•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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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7. 병자(丙子)의 난
  • 비고(備考)
  • 청(淸)나라의 침입
  • 제2차 침입

제2차 침입

이리하여 금나라는 조선에서 징수하여 명나라를 정벌할 병선(兵船)을 갖추기로 하고, 또한 형제의 맹약을 고쳐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기로 하는 등, 심한 압박을 가하였으므로, 조선은 그것에 분노하여 반항의 기세가 점차 국내에 퍼져 나갔다. 때마침 금나라에서는 국내외의 여러 왕들과 패륵들이 태종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게 하자는 건의를 하였으며, 이에 사신을 조선에 파견하여 그것을 알렸는데, 인조는 그 사신을 접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령(掌令) 홍익한(洪翼漢)은 상소를 올려 사신을 참수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자, 사신은 급히 민가(民家)의 말을 빼앗아 타고 도망쳤다.

이때 태종은 관온인성제(寬溫仁聖帝)라는 존호를 받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다. 태종은 먼저 군사력으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 숭덕(崇德) 원년(병자년) 【조선 인조 14년, 명나라 숭정(崇禎) 9년】 12월에 만주인, 몽고인 및 한인(漢人)으로 구성된 약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친히 조선으로 향하였는데, 심양을 출발하고 나서 고작 10일 만에 선봉의 병력은 이미 경성에 도달하였다. 인조는 크게 놀라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로 하여금 지원병의 계책을 세우도록 하고, 그 틈을 타서 우선 빈궁(嬪宮)과 왕자들을 강화로 옮겨 가게 하였으며 자신도 역시 뒤따라가려고 하였지만, 청나라 군대의 선봉이 이미 압박을 가해 오자 그럴 여가가 없었으므로, 급히 길을 바꾸어 세자와 백관들과 함께 남한산성(南漢山城) 【경기도 광주】 으로 들어갔다. 급히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또한 각 도(道)에 격문을 보내 충성을 다할 병사들을 징집하도록 하였다. 12월 16일에 청나라 군대는 진격하여 산성을 포위하였고, 이듬해 【정축년(丁丑年)】 정월에 태종은 친히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한강의 북쪽 강변에 주둔하였다. 산성은 포위당한 지 45일이 되자, 성 안에 식량이 바닥나고 장병들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괴로워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유구(流寇)에게 고통을 받고 있어 조선을 구원할 여가가 없었으므로, 각 도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는 앉아서 쳐다만 볼 뿐 나서지 않았다. 또한 나서는 자는 모두 청나라 군대에게 격파되었다.

이리하여 성 안에서는 화의와 전쟁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은 화의를 주장하였고,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은 그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여러 신하들의 논쟁은 매우 격렬하였다. 결국 화의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때마침 강화도가 함락되어 빈궁들과 여러 왕자들이 모두 청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혔으므로, 왕은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정월 30일에 세자와 함께 성을 나와 청나라 군대에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체결된 조약의 중요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와 조선 간에는 군신(君臣)의 예를 지킬 것

 (2) 조선은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와의 왕래 및 교류를 중단할 것

 (3) 조선 왕은 장자(長子) 및 차자(次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낼 것

 (4)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경우에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않고 출병하여 그를 도울 것

 (5) 조선과 일본의 무역을 허락할 것

 (6) 성절(聖節), 정삭(正朔), 동지(冬至), 경조(慶弔) 등의 사절은 명나라의 옛 예절에 따를 것

 (7) 세폐(歲幣)의 금액에 관한 사항

이때 태종은 수항단(受降檀)을 삼전도(三田渡)에 설치하고 왕의 항례(降禮)를 받고, 이튿날 세자 왕(𪶁) 및 봉림대군(鳳林大君) 호(淏) 【효종】 를 그들의 군대에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으며, 빈궁들과 여러 왕자들은 모두 북으로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그날 왕은 도성으로 돌아갔지만, 시가(市街)는 짓밟혀 인민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시체는 거리에 나뒹굴어 그 참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하였다. 그런데 여러 군대들 가운데 가장 난폭하게 약탈을 자행한 것은 몽고 병사들이었다. 당시 김상헌은 주로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항복한 후에는 파직되어 집에서 칩거하였는데, 17년 겨울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병사들을 조선에서 징발한다는 소문을 듣자, 강개하여 상소를 올려 그것에 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청나라는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찾아내어, 마침내 김상헌, 조한영(曺漢英), 채이항(蔡以恒) 세 사람을 붙잡아 심양으로 데려갔지만, 다시 옮겨 의주로 보냈다가 21년이 되자 모두 돌려보냈다. 이보다 앞서,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학사[三學士]도 역시 척화를 주장하여 청나라 군영에 끌려갔으며, 후에 심양으로 보내졌지만 결국 굴하지 않아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가 인조 16년 3월이다. 【『조야집요(朝野輯要)』·『조야첨재(朝野僉載)』·『조야회통(朝野會通)』·『병자록(丙子錄)』·『남한위록(南漢圍錄)』·『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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