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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집정(執政) 기간 중 주요 사항들

대원군(大院君) 집정 기간의 주요 사항들을 편의를 위해 아래에 연월(年月) 순으로 열거하여 기록한다.

이 태왕(李太王) 원년 갑자년(甲子年) 【일본 겐지(元治) 원년】 정월 종래에 당쟁으로 진로가 막혔던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승진을 허락하고, 북인 강시영(姜時永)을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으로 삼았다.

  2월 인재를 구하여 처사(處士)들을 소집하였다.

  4월 철종(哲宗) 시대부터 세도(世道)로 권세를 잡은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을 파면하였다.

  5월 『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였다.

2년 을축년(乙丑年) 3월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여 의정부(議政府)에 병합하였다.

  4월 경복궁 중수(重修)를 시작하였다.

  5월 원사(院祠)로서 가장 세력이 강하였던 청주의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하였다.

  9월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하였다. 이때부터 도서의 간행이 활발하여 『양전편고(兩銓便攷)』와 『육전조례(六典條例)』도 편찬하였다.

  11월 러시아 군함 1척이 원산(元山)에 와서 통상(通商)을 요구하였다.

3년 병인년(丙寅年) 【게이오(慶應) 2년】 정월 천주교도의 섬멸을 꾀하여 서양인 선교사 및 조선인 교도(敎徒)들 다수를 살육하였다.

  3월 경복궁 영건소(營建所)에 불이 났다.

  같은 달 민치록(閔致祿)의 딸이 왕비에 책봉되었다.

  7월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에 들어가 참화(慘禍)를 일으켰다.

  9월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로 공격해 왔다.

  같은 달 이항로(李恒老)가 상소를 올려, 토목(土木)을 중단하고 가렴(苛斂)을 금지할 필요를 논하였다.

  10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같은 달 처음으로 서북인(西北人)과 개성인(開城人)에게 높은 벼슬을 허락하였다.

  같은 달 이경하(李景夏)를 진무사(鎭撫使)로 삼아 강화유수(江華留守)를 겸직하게 하였다. 강화유수에 무신(武臣)을 임명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다. 이는 강화도를 군사적으로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11월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였다. 이는 경복궁 건설 비용이 부족함에 따른 것이다.

  12월 러시아인이 두만강변에서 함께 어우러져 교역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4년 정묘년(丁卯年) 【게이오 3년】 정월 처음으로 고려 왕씨의 후예들을 등용하여 왕정양(王庭楊)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임명하였다.

  2월 경복궁 영건소(營建所)에 불이 나 목재가 모두 불탔다.

  6월 청나라의 소총(小銃)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다.

  11월 경복궁 중건을 완성하였다.

5년 무진년(戊辰年) 【메이지 원년】 4월 독일인 오페르트가 덕산(德山) 【충청남도 영산군(靈山郡)】 에 잠입하여,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구(球)의 묘를 파헤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7월 국왕은 창덕궁(昌德宮)에서 경복궁으로 옮겨갔다.

  같은 달 삼군부(三軍府)를 부활하여 변정(邊政)을 통괄하게 하였다.

  10월 최익현(崔益鉉)은 상소를 올려 시정(時政)을 논하였다.

  같은 달 일본 정부는 소(宗)씨에게 명을 내려, 조선에 국서(國書)를 보내 유신(維新)의 일을 알리고, 옛날의 우호를 체결하는 데 힘쓰도록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 국서의 서사(書寫)와 인장(印章)이 옛날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회답을 거부하였다.

  11월 당백전(當百錢)을 폐지하고 청나라 돈을 사용하였다.

6년 을사년(乙巳年) 정월 대군(大君), 왕자군(王子君), 적왕손(嫡王孫), 왕손(王孫) 이외의 왕족들에게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임용되는 것을 허용하였다.

  11월 옛날에 폐지한 4군(郡)의 땅에 자성(慈城), 후창(厚昌) 【평안북도】 의 두 군을 다시 설치하였다.

8년 신미년(辛未年) 【메이지 4년】 3월 명을 내려 첩향(疊享) 서원(書院) 및 향현사(鄕賢祠)를 철폐하였다.

  같은 달 호포법(戶布法)을 시행하여 양반에게 그것을 부과하였다.

  4월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공격해 왔다.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은 광성(廣城)에서 방어하다 전사하였다. 이어서 미군도 퇴각하였다.

  같은 달 척화비(斥和碑)를 국내의 큰 도시의 번화가나 큰 읍들에 세웠다.

9년 임신년(壬申年) 【메이지 5년】 8월 일본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수호(修好)를 위해 부산에 왔다.

10년 계유년(癸酉年) 【메이지 6년】 5월 조선 정부는 예전에 일본에서 보낸 국서에 답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래(東萊)와 부산(釜山)의 두 사(使)는 일본인 단속에 관한 전령서(傳令書)를 발령하고 언사가 매우 무례하였다. 이리하여 본국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들끓었다.

  11월 최익현은 다시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실정을 통렬하게 논하여 제주에 유배되었다.

  같은 달 대원군이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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