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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의 중건(重建)

경복궁(景福宮)은 조선 태조(太祖) 3년에 창건된 것인데 그 후 약 2백 년이 지나 임진란(壬辰亂) 때 난민(亂民)들이 불을 질러 훼손되었다. 그로부터 270여 년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재건을 시도하였지만 이루지 못하다가, 이 태왕 2년 【일본 게이오(慶應) 원년】 4월에 이르러 다시 교서(敎書)로 경복궁의 중건(重建)을 발표하고 대원군이 그것을 주관하였다. 중건을 위하여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고, 조두순(趙斗淳)과 김병학(金炳學)을 도제조(都提調)에, 이경하(李景夏)와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 【대원군의 형】 등을 제조(提調)에 임명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공사가 시작될 무렵 박경회(朴慶會)라는 사람이 경성(京城)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 석경루(石瓊樓) 터에서 옥배(玉杯)를 얻었다고 하면서 그것을 바쳤다. 이 배(杯)의 명문(銘文)에 “壽進寶酌”이라는 글과 대원군의 성운(盛運)을 축하하는 의미의 문장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여러 신하들은 축하의 말을 올렸으며, 대원군은 그것을 이용하여 건설의 기세를 높였다. 건설의 재원은 주로 원납전(願納錢) 【원납전의 본뜻은 스스로 원해 돈을 상납하는 돈을 의미하지만, 이때는 관작(官爵)을 주겠다고 공언하여 돈을 기부하게 하고 그것을 원납전이라고 불렀다.】 에 의지하였으며, 그 징수한 금액은 기공(起工) 【2년 4월】 부터 준공(竣工) 【5년 7월】 까지 모두 약 740만 냥의 거액에 달하였다. 재원의 징수는 단지 원납전에 그치지 않고, 결두전(結頭錢) 【결두전은 전답(田畓)의 세곡(稅穀)에 부가하여 징수하는 금액을 말한다.】 을 고율로 인상하기도 하였고, 혹은 도성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문세(門稅)를 부과하거나 검전(檢田)을 실시하여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하였고, 혹은 문무(文武) 관리들의 봉록(俸祿)의 일부를 떼어내어 헌납하게 하는 등 주구(誅求)가 극심하였다. 대원군은 이들 재원으로도 여전히 경비가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자 화폐제도를 고침으로써 그것을 미봉하려고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였고, 【3년】 이어서 또한 그것을 폐지하고 청나라 화폐를 대신 사용하기도 하였다. 【5년】 당시 곡식이 여물지 않았으므로 위와 같은 수단을 선택하여, 경제계(經濟界)는 갑자기 혼란스러워 동요하였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는 큰 반항의 기세가 격렬해졌다. 또 대원군은 궁전 건립에 필요한 큰 돌이나 큰 나무들을 전국에서 징발하였는데 민간에서 제사 지내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고 분묘에 심어 놓은 나무조차도 벌채하여, 조금도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백성들을 내몰아 활발히 공사에 종사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매우 꺼려하여 쌓아 놓은 목재를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경복궁은 이 태왕 4년 11월에 완공되었으며, 이듬해 【메이지 원년】 7월에 국왕은 창덕궁(昌德宮)에서 경복궁으로 옮겨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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