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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新敎)의 전래와 포교

서양에서 기독교 신교(新敎) 즉 프로테스탄트의 흥기(興起)는 근세의 일에 속하며, 천주교(天主敎)가 동아시아에 전해진 것은 주로 신교의 발흥에서 기인하였다. 따라서 신교가 조선에 들어온 것도 매우 최근의 일에 속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서기 1832년 【순조 32년】 에 프로이센 사람 기츠라프 【Giitglaff】 는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신교의 포교를 시도하려고 하였다. 그는 네덜란드 전도협회(傳道協會)의 후원 하에 영국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의 배에 타고 동양으로 왔다. 그해 7월에 전라도 해안에 도착하여 책과 약품 등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국왕에게는 관리를 통해 성서(聖書), 유리(琉璃), 면포(綿布)를 증정하였지만, 이 증정품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정부가 기독교를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였으므로, 기츠라프는 해안에 머문 지 약 1개월 후에 덧없이 돌아갔다. 그 후 반도에는 천주교가 만연하여 여러 차례 정부의 박해를 받아 그 성쇠(盛衰)는 무상하였다. 그러나 이 태왕 10년 【메이지 6년, 서기 1873년】 에 이르러 대원군이 은퇴하고 민씨가 정권을 좌우하게 되자, 외교 정책이 변경되어 기독교도에 대한 압박도 완화되었다. 천주교의 선교는 점차 성황을 이루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교의 선교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태왕 21년 【메이지 17년, 서기 1884년】 9월에 신교 선교사 박사(博士) 호레스 N. 알렌 【H. N. Allen】 은 미국 공사관 부속 의사로서 조선에 들어왔으며, 동시에 포교(布敎)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신교 선교의 효시로, 그 종파(宗派)는 북미(北美) 프레스비테리언 【북장로파(北長老派)】 에 속하였다. 이듬해인 23년 【메이지 19년, 서기 1886년】 에 같은 파의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포교에 종사하였으며, 같은 해에 북미 메소티스트 【북감리파(北監理派)】 의 대표자도 역시 왔고, 그 후 각종 종파들이 미국에서 왔으며, 영국협회파(英國協會派)와 러시아정교 등도 점차 수입되었다. 원래 기독교는 여러 가지 문화사업을 수반하여 들어오는 것이 보통인데, 신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이런 경향이 뚜렷하였다. 이 태왕 23년 【메이지 19년, 서기 1886년】 에는 이미 많은 학교들이 각 파의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같은 왕 22년 【메이지 18년, 서기 1885년】 에 북감리파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배재학당(培材學堂)과 같은 경우는 국왕이 그 명칭을 하사하였다. 그 밖에 자선사업으로서 병원과 고아원도 운영되었다.

이러한 사업들은 신교의 보급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 태왕 23년 【메이지 19년, 서기 1886년】 에는 조선인으로서 신교에 가입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25년 【메이지 21년, 서기 1888년】 에 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기 위해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12년이 지난 37년 【메이지 33년, 서기 1900년】 에 처음으로 『신약전서(新約全書)』가 완역되기에 이르렀고, 점차 발전하여 그 활동을 오늘날과 같이 왕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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