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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의 관계

러시아는 점차 시베리아를 점령하였으며 또한 중국의 영토를 빼앗아 이 태왕이 즉위하기 전에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점차 조선을 주시하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후 조선은 러시아와 통상조약(通商條約)을 체결하여, 【메이지 17년, 이 태왕 21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 가 경성에 와서 주재하였다. 이 무렵은 임오정변(壬午政變) 후여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던 때였지만, 오히려 그 억압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교제(交際)의 수완이 매우 뛰어났던 러시아 공사와 그 부인은 그에 편승하여 교묘하게 국왕과 왕비의 신임을 얻었으며, 궁정의 안팎에 친러파(親露派) 사람들을 만들어 점차 자국(自國)의 이익을 취하기에 급급하였다. 일청전쟁(日淸戰爭) 후 일본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 3국의 간섭을 받고, 일단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으로 청나라에게 할양(割讓)받은 요동반도(遼東半島)를 돌려주는 등의 일로 반도에서의 세력이 감퇴되었다. 이 틈을 타 러시아는 점차 그 야심을 드러냈다. 때마침 메이지 29년 【개국 505년, 이 태왕 33년】 2월에 강원도 춘천에서 폭도들이 일어나, 친러파와 친미파 사람들을 멀리한다는 명분으로 몰래 국왕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2월 11일】 국왕이 외국 공사관으로 옮겨간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국왕의 명이라고 칭하여 총리대신 이하 친러파와 친미파를 좋아하지 않는 중신(重臣)들을 붙잡아 살해하였는데 그 잔인함이 이를 데 없었다. 살해당한 중신들 대신 자기 당 사람들로 자리를 대체하였다. 바로 삼림을 벌채하고 광산을 채굴하며 혹은 철도를 부설하는 등의 권리들을 러시아와 북미합중국 및 프랑스 등의 사람들에게 허가한 것은, 모두 같은 해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동안의 일들이다. 그 가운데 현재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은 미국인의 운산(雲山) 금광(金鑛) 【평안북도】 경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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