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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조약(慶興條約)

그렇지만 베베르는 그로 인해 굴하지 않았고, 이홍장이 멜렌도르프의 후임으로 파견한 미국인 듀는 청나라를 위해 속임수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언젠가 또 베베르 수중(手中)의 사람이 되어, 한국 조정에서 베베르를 위해 알선하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이홍장은 스스로 한 편의 헌책서(獻策書)를 조선 국왕에게 보내 러시아와 육로통상조약 체결이 불가하다는 것을 열심히 설득하였지만, 베베르는 기회를 보아 이 조약의 내용을 고쳐 메이지 21년 8월에 경흥을 개시(開市)한다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경흥조약(慶興條約)이라고 한다.

그에 따라 두만강 연안 백 리에 걸친 땅을 개방하는 대신 단지 경흥부(慶興府) 한 곳만을 개시하는 데 그칠 수 있었다. 그 후 베베르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한국 조정 내에 세력을 심고, 오로지 조선이 청나라에 병탄(倂呑)되지 않도록 하는 것만을 주시하였다. 왜냐하면 청나라가 반도를 병합하는 것은 러시아가 남하하는 데 장애가 되고, 또한 영국 세력의 증강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메이지 27년에 일청전쟁이 일어나자 반도에서 러시아의 상대인 청나라는 추락하고 일본의 세력이 대륙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와 동맹을 맺고,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을 반환하게 함으로써, 사대(事大)의 생각이 강한 한국 조정이 러시아에 의지하게 하였다. 이에 친러파들을 결속하여 일청전쟁 전의 중국이 하였던 것과 같은 행동을 재연하였다. 그 때문에 갑오년(甲午年) 이래 점차 개진(改進)의 경지로 향하던 국운은 다시 역전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여 일본에 의뢰하여 러시아의 야심을 좌절시키려는 사람들이 배출되어, 친러파와 친일파의 암투는 매우 격렬해졌다. 한 편이 다른 편을 소멸시키지 않으면 자기가 존립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고, 결국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의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발하게 되었다. 왕후 민씨는 불행하게도 그 변란 중에 세상을 떠났다. 【본과 비고 3 「을미사변(乙未事變)」 참조】 이후 친러파 및 친미파 사람들이 주(主)가 되어, 한때 국왕 및 왕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보내고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계속하여 반대파를 박멸하였다. 【본과 비고 4 「국왕의 러시아 공사관 파천(播遷) 사건」 참조】 이것은 모두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배후에서 획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이 러시아와의 협상에 힘을 기울인 결과, 국왕 및 왕세자는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 지 약 1년 만에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베베르 공사도 역시 메이지 29년 1월에 전임(傳任)을 명받았다. 베베르가 전임의 명을 받았지만 당시 국교가 복잡다단하여 급히 경성 땅을 떠나지 못하고, 이듬해 9월에 스페이에르 【Speyer, 사패야(士貝耶】 가 그의 후임으로 입성하자, 베베르는 비로소 멕시코 공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그 후 친러파는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할 때까지 여전히 갖가지 경거망동을 획책하는 데 몰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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