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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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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왕의 러시아 공사관 파천(播遷) 사건
  • 국왕이 단발(斷髮)을 하다

국왕이 단발(斷髮)을 하다

이에 앞서, 국왕은 백성들에게 솔선하여 스스로 단발(斷髮)하고 풍습 혁신의 모범을 보였으며, 이해 12월 【음력 11월 15일】 에 조서(詔書)를 내려 신민(臣民)에게 단발할 것을 장려하엿다. 같은 달에 또 칙령을 내려 태음력(太陰曆)을 폐지하고 태양력(太陽曆)을 시행하였으며, 건양(建陽)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정하여 11월 17일부터 이를 시행하였다. 【제11과 비고 12 「개국(開國) 기년(紀年)」 참조】 관리들은 공을 세우는 데 급급하여 인민들에게 단발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10월 이래 사변(事變)이 빈발하여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여기에 더하여 정부는 급속하게 혁신을 진행하려고 하였으므로, 인심은 더욱 험악해지고 포악한 무리들이 도처에서 출몰하여 소란을 선동하였다. 춘천·원주·제천 등 여러 지역에서 도적 무리들이 봉기하여, 의병을 칭하면서 양민들을 괴롭히고 강원도 관찰사 조인승(曹寅承)과 충청도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비롯하여 군수 등 살상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더군다나 새로운 정부에 대해 탐탁해하지 않던 사람들은 단발령(斷髮令) 및 건원(建元)의 일 등에 대해 비난하자 여론이 들끓어 지방관(地方官)의 직책을 포기하고 귀향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메이지 29년 【건양 원년】 1월에 정부는 관리를 강원도에 파견하여 선유(宣諭)하도록 하였지만 그 효과가 없었다. 도적 무리들이 곧 기전(畿甸)을 쳐들어갈 염려가 있었으므로, 경성의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인천에서 급히 수병(水兵)들을 불러들여 몰래 대비하였다. 이리하여 전년(前年) 11월의 사변에 실패하여 러시아·미국 공사관으로 도피하였던 무리들은 경성의 수비 병력이 적은 틈을 타 다시 국왕을 꾀어내려고 시도하였고 마침내 2월 11일 【음력 12월 28일】 에 국왕은 왕세자와 함께 왕궁을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갔다.

러시아 공사관 내에서는 이범진(李範晉) 등의 친러파·친미파 사람들이 정권을 잡자, 총리대신 김굉집(金宏集)과 농상부대신(農商部大臣) 정병하(鄭秉夏)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 경복궁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갑자기 순검(巡檢)에게 체포되었으며 경무청(警務廳)에서 참살되었고 시체는 난민들에게 수모를 당하였다. 이 밖에 도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은 용인(龍仁)에서 살해되었고, 유길준(兪吉濬) 등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왕은 조서를 내려 예전에 발표하였던 왕후 폐위와 복위의 두 조서를 취소하고, 10월의 사변으로 사형을 받은 사람들의 관작을 복직시켰으며, 전 정부의 잔당들을 처벌하고, 도피한 자들을 신속히 체포할 것을 명하였으며, 단발령과 기타 새롭게 고친 사항들의 철폐를 선언하는 등 정계의 분란은 극에 달하였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들어가자, 정부는 사자(使者)들을 여러 방면에 파견하여 소란의 진무에 힘쓰게 하였다. 또한 갑오년 이후의 새로운 여러 시설들을 철폐하고 옛 제도를 회복하고, 내각도 의정부(議政府)로 고쳤다. 【제11과 비고 10 「관제(官制)의 개정」 참조】 외국 사신들 중 특히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의 공사들에게 접근하여, 이들 사신들에게 철도, 광산 등의 이권(利權)을 허락해 주었다. 이리하여 국왕은 러시아 공사관에 체재한 지 꼭 1년이 되었는데, 이 사이에 일본은 러시아와 두 차례 협상을 거듭하엿고 그 결과 메이지 30년 2월에 국왕 및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가까운 경운궁(慶運宮)의 수리·완성을 계기로 같은 달 11일에 이 궁궐로 돌아갔다. 【『일성록(日省錄)』·『러시아어 조선지(朝鮮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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