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일제강점기
  •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교수참고서 - 2
  • 13.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 비고(備考)
  • 메이지 37〜38년의 전쟁
  • 용암포(龍岩浦) 문제

용암포(龍岩浦) 문제

러시아는 제2차 철병 기한인 메이지 36년 4월 전후부터, 다수의 병력을 봉황성(鳳凰城) 방면에 집중시켰으며, 더군다나 그 지대(支隊)를 안동현(安東縣)에 주둔시켜 한국을 위압하였다. 이것은 최근에 러시아가 한국 조정에 경의철도(京義鐵道) 【경성·의주 간】 의 부설권을 요구하였다가 실패하였지만 용암포(龍岩浦) 조차(租借) 문제에서는 반드시 성공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메이지 29년에 러시아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 베조브라조프는 압록강 연안의 큰 삼림(森林)을 벌채하기 위해 회사를 창설하고, 자신이 경영을 맡았으며, 후에 대변인으로서 경성(京城)에 남작(男爵) 군스베르그를 체재하게 하였다. 36년 4월에 군스베르그는 한국 조정과의 비밀계약 하나를 체결하였다는 설(說)이 항간에 자자하자, 일반인으로 변장한 러시아 병사들은 대동구(大東溝) 【압록강 하류의 우측 연안의 청나라 영토】 에서 무기를 밀수하였으며, 또한 의주(義州)에 난입하여 조약(條約) 구역(區域) 밖인 백마산(白馬山)의 목재 벌채에 종사하면서 용암포 부근의 측량을 시작하였다.

용암포는 의주의 서남쪽 압록강 하류에 있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대동구에 대한 요충지였다. 36년 4월 중순 이래 러시아인들은 부근의 토지와 가옥을 매수하고 전선을 가설하여 광대한 땅을 고르게 하는 공사를 시작하는 등 영구적인 시설에 착수하였다. 한국 조정은 크게 놀라 경성 주재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에게 여러 차례 항의하였지만 국력이 미약하여 그 주장을 관철시킬 수 없었다. 양국이 빈번히 교섭을 거듭함에 따라 러시아의 요구는 더욱 급박해져, 용암포 조차는 마침내 사실이 되어 나타났다. 때마침 러시아 황제는 육군 대장 알렉세예프를 극동총독에 친히 임명하고 외교와 군사의 최고 권한을 부여하여 여순구(旅順口)에 주재하게 하였다. 동양의 여러 나라에 주재하는 러시아 외교관과 육군·해군 사령관 등은 이 땅에서 회합하여 만주 침략에 관한 모의를 꾸몄다. 이때 러시아 동양함대 전체는 여순구에 집결하여 육·해군 연합 대연습을 거행하였으며, 또한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에서는 실탄 사격을 실시하는 등, 오로지 위력시위 운동에 급급하였다. 만약 이러한 정세대로 나아간다면, 만주는 완전히 러시아가 영유(領有)하게 되어, 한국의 독립은 기대할 수 없었다. 동아시아 땅은 실로 존망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