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에 조선 서쪽 방면에서 온 정보에 따르면 러시아는 의주 건너편 연안에 러시아 군대 4, 5천 명과 포(砲) 20문을 이끌고 왔으며, 그 척후(斥候)는 한국 내에 출몰하여, 기회를 보아 남하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당시 평양 이남의 각지에는 전진하고 있던 우리 병참부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키고시 소장은 곧바로 보병 제46연대 제7중대를 인천항에서 해로(海路)를 통해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때마침 제12사단장 육군 중장 이노우에 히카루(井上光)는 잔여 부대의 장수로서 한국으로 건너가, 제12여단장 육군 소장 사사키 타다시(佐佐木直)로 하여금 육로를 통해 경성에서 평양으로 진군하여 병참선(兵站線)을 엄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평양이 아직 적의 수중에 들어가기에 앞서, 보병 중좌(中佐) 기무라 노부아키(木村宣明)는 21일 오전 10시에 평양을 점령하고 북쪽 공격의 근거지로 삼았다. 같은 달 28일에 적 기병 14〜15명은 병현(竝峴) 【평양 북쪽】 부근에 온 우리 장교(將校) 척후를 추격하여 기자릉(箕子陵) 부근까지 왔지만, 칠성문(七星門)의 우리 소초(小哨)와 전투를 벌여 격퇴되었다. 이것이 일본과 러시아 육군이 충돌한 최초의 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