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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日本海)의 해전

러시아는 개전 초기부터 여순구의 태평양함대가 항상 패전을 계속하여, 해상권(海上權)을 실추함에 따라, 발틱함대를 동쪽으로 가게 하여, 세력의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다. 이 함대는 37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잇따라 리바우 군항을 출항하여, 5월 상순에 프랑스령 안남(安南) 앞바다에 집결하였다. 함선의 총 수는 38척으로, 해군 중장 로제스트벤스키가 전체 함대를 지휘하였는데, 쓰시마 해협을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항해해 가려 하였다. 우리 연합함대는 여순구를 함락시킨 후, 해상(海上)의 봉쇄를 풀고, 한국의 진해만(鎭海灣) 【경상남도】 을 본거지로 하여, 일부분을 사세보(佐世保) 군항, 다케시쿄(竹敷要)항, 【쓰시마(對馬)】 유야만(油谷灣) 【야마구치현(山口縣)】 등에 배치하고, 오로지 사기를 북돋우면서 적이 북상(北上)하기를 기다렸다.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도고(東鄕) 대장은 5월 27일 오전 5시에 초함(哨艦) 시나노마루(信濃丸)호로부터 적 함대가 203지점 【나가사키현(長崎縣) 고도(五島) 부근】 에 보인다는 보고를 접하고, 기함(旗艦) 미카사(三笠), 시키시마(敷島), 후지(富士), 아사히(朝日), 카스가(春日), 닛신(日進), 【이상은 제1함대】 이즈모(出雲), 히데오(吾妻), 야쿠모(八雲), 도키와(常盤), 아사마(淺間), 이와테(巖手) 【이상은 제2함대】 의 주력함(主力艦) 이하 거의 우리 해군의 전부에게 출동을 명령하였으며, 또한 “황국(皇國)의 흥폐(興廢)는 이 일전(一戰)에 달렸으며, 각 대원들이 한층 분발하여 노력하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우리의 장졸(將卒)들은 한번 죽음으로써 군국(君國)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오후 2시에 전투는 충도(沖島)의 동북쪽에서 시작되었다. 잠시 적함 오스라비야는 화재가 나 전열(戰列)에서 벗어났으며, 스와로프, 알렉산더 3세, 볼로딘 등은 격침되거나 혹은 크게 파손되어 진열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일몰에 이르자 도고 사령장관은 구축정대(驅逐艇隊), 수뢰정대(水雷艇隊)에게 전투를 맡기고, 주력함대는 다음날 아침을 기해 울릉도 부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경쾌한 구축정대, 수뢰정대는 어둠을 틈타 동, 남·북의 세 방면에서 패잔한 적 함대를 습격하여, 나바린을 격침시키고, 시소이베리키, 나히모프, 모노마프 등 3척은 전투 항해력을 상실하였다. 다음날인 28일 아침에 울릉도 부근에서 네보카도프 소장이 이끄는 니콜라이 1세 이하 5척의 전함은 우리 함대에게 포위되어 달아날 길을 잃자 마침내 항복을 요청하였다. 사령장관 로제스크벤스키는 중상을 입어 구축함으로 옮겨 타고 북쪽으로 달아났지만, 우리 구축함에게 쫓기다 막료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처음에 적함이 전투에 참가한 것은 크고 작은 것들을 합쳐 36척이었는데, 그중 격침된 것이 20척, 포획된 것이 5척, 나머지는 탈주하다 파괴되어 침몰하거나 혹은 중립항에서 무장을 해제당하였다. 용케 블라디보스토크로 도망쳐 들어간 것은 고작 소함정(小艦艇) 3척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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