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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사건

메이지 40년 6월에,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그 이름이 보여 주듯이, 전쟁의 참화를 없애고 평화의 촉진에 공헌하기 위하여 열국(列國)의 위원들이 협의하는 회합이었다. 한국의 외교는 메이지 38년의 협약에 따라, 이미 우리나라[일본]에게 위임하였으므로, 평화회의는 우리 위원들이 출석한 이상, 한국 사절이 겹치게 파견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6월 29일에 한국 황제의 밀사(密使)라고 칭하는 자들이 갑자기 헤이그에 나타나, 평화회의에 위원의 대우를 받으려고 운동을 벌였다. 밀사는 예전에 협약에 반대하여 직위에서 면직된 전(前)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 이준(李儁), 전 러시아 주재 공사관 서기 이위종(李瑋鍾) 등 세 사람이었다. 이상설이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한국 황제를 알현하고, 친히 신임장(信任狀)을 받은 후, 4월 20일에 이준과 함께 경성을 출발하여, 육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으며, 거기에서 다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이위종과 회합하여, 함께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그들을 도운 사람은 미국인 헐버트 【일찍이 경성에서 저술업(著述業)에 종사하였으며, 또한 한국 정부에 채용되어 교사가 되었던 사람】 였다. 세 사람은 한국이 평화회의 참석 통고를 받지 못한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면서, 새로 참석의 권리를 얻으려고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각국 위원들을 방문하면서 호소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하여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회의 참석을 통고할 특권을 가진 네덜란드 정부도 역시 단호히 그들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리하여 그들은 활발히 우리나라[일본]를 비방하였지만 한국 문제는 한 번도 회의의 의제(議題)가 된 적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준은 병 때문에 세상을 떠나고, 이상설과 이위종 두 사람은 다른 방책이 없게 되자 쓸쓸히 미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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