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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해산

메이지 40년 【융희 원년】 7월 31일 밤에 한국 황제는 군대 해산의 조칙을 발표하였다. 그것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국사(國事)가 다난(多難)한 가을에 지금 극도로 불필요한 비용을 절약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업(業)에 이용하는 것은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현재의 군대는 용병(傭兵)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아직 국가를 완전히 방위하는 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황실 시위(侍衛)에 필요한 인원을 선발하여 배치하는 것 말고는 잠시 군대를 해산하고, 후에 징병법(徵兵法)에 따라 힘 있는 군대를 편성하고자 한다.

같은 날 밤에 한국 정부는 군대 해산에 즈음하여 인심의 동요를 예방하고 폭동을 진압할 것을 통감에게 의뢰하는 취지의 칙명을 받드는 뜻을 공문으로 통감에게 통지하였다. 다음날인 8월 1일에 경성에 있는 군대를 훈련원(訓練院)에 집합시켜 해산식을 거행하고, 각 병사들에게는 많은 은사금(恩賜金)을 나누어 주고 무사히 마무리하였다. 단지 시위 제1연대 제1대대만은, 같은 날 오전 8시에 훈련원의 해산식에 인도(引導)되려고 할 때, 이 부대 대대장 박성환(朴星煥)이 갑자기 건물 안에서 자살하자, 이와 동시에 정렬해 있던 병졸들은 들끓듯이 혼란해졌으므로, 인접한 시위 제2연대 제1대대도 역시 그로 인해 소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양쪽 막사의 한국 병사들은 창고 안의 탄약을 탈취하여 난사(亂射)하였지만, 곧장 우리 군대에게 격퇴되었다. 이때 중대장 보병 대위 가지하라 요시히사(梶原義久) 등이 전사하였다.

경성에 있는 여러 부대의 해산에 이어, 지방의 8개 진위대(鎭衛隊)의 해산을 시행하였다. 진위대의 소재지는 수원, 청주, 대구, 광주, 원주, 해주, 안주(安州), 북청(北靑) 등 8곳으로, 각 대대는 약간의 분견대(分遣隊)를 가지고 있었다. 이 해산은 예상 외로 평온하게 진척되어, 8월 3일 수원 진위대를 시작으로 하여 9월 3일 북청 진위대를 마지막으로, 전국 진위대 및 분견대의 해산을 완료하였다. 이 사이에 해산의 명에 반대하여 저항한 것은 강화도 분견대뿐이었지만, 곧바로 우리 군대에게 평정되었으며, 원주 진위대는 해산의 명에 앞서,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무기를 지니고 도망쳐,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폭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2년이 지나, 메이지 42년 7월 30일에 한국 황제의 조서(詔書)로서 군부(軍部) 및 무관학교(武官學校)를 폐지하고, 잔류한 근위(近衛) 보병 1개 대대 및 기병(騎兵) 1개 중대는 궁중에 친위대(親衛隊)를 두고 그들을 관할하였으며, 사관(士官) 양성은 일본국 정부에게 위탁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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