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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一進會)와 천도교(天道敎)

일진회는 메이지 37년에 송병준(宋秉畯) 등이 창설한 정치단체로서, 윤시병(尹始炳) 【원래 독립협회의 수령】 이 그 회장이었다. 이에 앞서 동학(東學) 【제11과 비고 7 「동학당(東學黨)」 참조】 의 교주(敎主) 손병희(孫秉熙) 【제3대 교주, 호는 의암(義庵)】 는 동학에 대한 정부의 금지가 여전히 엄격하였으므로, 그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몰래 외유(外遊)를 시도하여,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갔는데, 그 사이에 5, 6년이 걸렸다. 【메이지 34년부터 39년까지】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였을 당시에 그는 일본에 있었으며, 우리나라[일본]의 필승을 의심하였는데, 시기가 이르렀다고 하여, 일금 만 원(圓)의 군대 위문금을 육군성(陸軍省)에 헌납하고, 그의 복심(腹心)의 동지인 이용구(李容九)로 하여금 조선에 돌아가, 동학(東學)의 남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이때 마침 송병준(宋秉畯) 등은 일진회원들을 이끌고 일본의 군사 행동을 돕고 있었는데, 사방에서 많은 공격을 받아 그 발전은 예측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메이지 37년 6월에, 쌍방의 합의가 무르익자, 진보회를 모두 일진회에 합치기로 결정하고, 윤시병을 일진회 회장으로 삼았는데 그 회원은 백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단발(斷髮)을 회원의 표식으로 삼았으며, 더욱 일본의 군사행동을 원조하여, 그 공이 적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형세였으므로, 메이지 38년에 일본에 머물고 있던 손병희는 동학의 이름을 천도교(天道敎)로 고치고, 이어서 메이지 39년 1월에 통감부가 설치되었을 때, 비로소 수만 명의 교도(敎徒)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일본에서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용구는 윤시병 대신 일진회장이 되자 천도교와 일진회는 거의 이명동체(異名同體)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손병희와 이용구, 김연국(金演局) 등의 사이에 틈이 생겨 손병희는 마침내 이용구와 김연국 두 사람을 천도교에서 제명하였다. 제명된 그들은 신자(信者)들을 이끌고 따로 일파(一派)를 창립하여 시천교(侍天敎)라고 일렀으며, 이용구 【시천교주 제1대, 호는 봉암(鳳庵)】 를 추대하여 교주로 삼았다. 이때가 메이지 39년 9월이다. 그리고 이용구가 일진회 회장이라는 것은 그 전과 같았다. 이어서 메이지 40년 5월에 내각이 교체될 때, 송병준이 입각하여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이듬해인 41년 6월에 다시 내부대신(內部大臣)의 요직을 맡았으므로, 일진회의 세력은 그야말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형편이 나날이 잘못되어 메이지 42년 10월 26일에 하얼빈 사건까지 일어나게 되었으므로, 일진회 간부들은 이에 근본적인 해결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진회장 이용구와 회원 백만 명의 명의로 솔선하여 일한합방의 필요성을 천하에 발표하였다. 동시에 황제에게 상주(上奏)하고 통감과 내각총리대신에게 글을 올려, 일본과 한국이 신속히 한 집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통렬히 주장한 것은 바로 같은 해 【융희 3년】 12월 4일이었다. 【송병준은 42년 2월에 이미 내부대신을 사임하였다.】 그 후 메이지 45년 5월에 이용구가 사망하고, 송병준 【시천교의 제2대 교주, 호는 제암(濟庵)】 이 그 승통자(承統者)가 되어 시천교를 통솔하였는데, 김연국(金演局) 【별도의 제1대 교주, 호는 구암(龜庵)】 일파와 화합하지 못하여 이 교(敎) 안에는 송병준파와 김연국파가 별도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정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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