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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의 벌어짐

1.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의 벌어짐

(가) 신라는 제37대 선덕왕 시대부터 (국기 3113년, 서기 780년경) 쇠퇴기로 들어갔다. 선덕왕 이후로 점점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기강이 풀렸으며 왕족 사이에는 왕위의 다툼이 잦았다. 특히 제51대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폐신이 농간을 하여 정치와 기강이 더욱 무너졌으며 국고가 탕갈되고 전제가 무너져 가렴주구가 심했을 뿐만 아니라 흉년이 연달아 들어 백성들은 기근에 빠져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하여 반란은 각처에서 벌떼같이 일어나고 초야에 묻혀 있던 호걸들이 사방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니 궁예와 견훤은 실로 이때에 일어난 것이다.

(나) 『태봉(후고구려)과 후백제의 출현』 궁예는 신라 왕족이었으나 어려서 불우하여 절에 들어가 중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담력이 있고 가슴에 풍운의 뜻을 품어 때가 오기를 기다리더니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내는 소란하였다. 궁예는 처음 북원(원주)의 괴수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가 그의 세력이 차차 커지자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궁예는 강원도 일대로부터 경기, 황해에 걸쳐 세력을 펴자 이에 향응하는 사람이 또한 많아 평안남도 일대까지도 움직였다. 이와 같이 궁예의 세력 범위는 대개 고구려의 옛 강토이었으므로 인심을 거두기 위하여 고구려를 부흥한다 하고 철원을 도읍으로 나라를 세워 (국기 3234년, 서기 901년) 국호를 마진이라 하였다가 뒤에 태봉이라 고쳤다.

견훤은 본래 농민 출신으로서 군대에 몸을 던져 일찍이 서남 해안 지방에 수자리도 산 일이 있었다. 그는 본시 용감하였으며 큰 뜻을 품고 있더니 진성여왕 때에 국내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에 견훤은 그의 도당을 불러 모아가지고 서남 각지를 공략하여 무진주(광주)를 손아귀에 넣으니 사방이 그에게 향응하였다. 견훤은 다시 북으로 완산주(전주)를 차지한 다음에 인심을 끌기 위하여 백제를 부흥한다 하고 완산을 서울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 (국기 3225년, 서기 892년)

(다) 『후삼국의 국면』궁예와 견훤이 역사적 사실을 이용하여 민심을 거두어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운 결과 삼국의 판국이 또다시 벌어졌다. 특히 견훤과 궁예사이에는 맹렬한 쟁패전이 끊임없었으며 대개 충청도 중부 일대가 그들의 경계선으로 충돌을 거듭하던 땅이었다. 특히 견훤은 외교진을 또한 강화하려 때로 바다를 건너 중국의 후당과 오 및 월과 국교를 맺었으며 궁예는 그 교통로를 끊고 견훤의 해상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나주와 진도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쇠망의 길을 밟고 있던 신라는 서쪽으로 견훤의 침략을 받아 경상도의 서부 일대를 빼앗기고 북쪽으로는 궁예에게 경북의 북부를 잃어 그 영역은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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