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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여진 및 일본과의 관계

2. 여진 및 일본과의 관계

여진족은 원래 문화 정도가 자못 낮은 민족으로서 고려에서는 그들을 열등한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은 발해가 망한 뒤로 동남 만주와 우리의 압록강 유역 및 함경도(함흥 북쪽) 일대에 흩어져 얼마 동안 (금나라가 일어날 때까지) 부락 생활을 하였다.

고려에서는 특히 함경도 방면의 여진인을 동번 또는 북번이라 하고 압록강 방면의 여진인을 서번이라 불렀다. 이들 여진족에 대해서도 대개 무마책을 썼던 것이다. 당시 여진족은 고려를 가리켜 상국 또는『부모의 나라』라 하여 그들 부장들 가운데에는 공물을 바쳐 내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가리켜 향화인이라 하였으며 그들 가운데에는 귀화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이같이 내부하는 여진 부장에게는 대광·장군 등의 관직을 주고 특히 공이 있는 자에게는 성명까지 더하여 내려주며 그들을 기미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입공에 대해서도 흔히 일정한 시기와 인원수를 정해 주었다. 그들의 공물은 대개 마필, 표피, 부금(麩金), 과선(戈船), 병기, 철갑, 궁시 등이며 고려 조정에서는 면서(綿絮), 경우(耕牛), 부정(釜鼎) 등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상사품으로 주었다. 이것도 또한 공적 무역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향화인의 무마 정책은 한편으로는 다른 여러 여진 부락을 견제하는 데에도 큰 효과가 있었다.

『일본과의 관계』 고려와 일본은 국초부터 정식 통교를 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종 시대에 이르러 왜구가 침범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뒤에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있은 뒤에는 양국의 교섭이 더욱 두절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 왜구의 포악이 더욱 심하여 부녀자와 아동을 살육하는 등 사람의 도리에 어그러지는 잔인한 행동을 많이 행하였으므로 우왕 때에 나흥유와 정몽주를 일본에 보내어 왜구의 금함을 교섭하였다. 당시 일본의 실정(室町) 막부는 그의 변방을 통제할 힘이 없으므로 교섭의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정몽주는 구주탐제(九州探題)인 금천료준(今川了俊, 이마가와 료순)에게 교린의 큰 도리를 일깨워 주어 그를 크게 감복시켰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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