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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편 근세 (이씨 조선)
  • 근세의 중기(국기 3901-4057년, 선조 원년-경종 말년)
  • 제3장 북방 문제와 호란
  • 1. 광해조의 오랑캐에 대한 비책

1. 광해조의 오랑캐에 대한 비책

선조 다음에 즉위한 광해군 때에는 안으로 소북, 대북의 당인들이 정권을 잡아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켰다. 【광해군의 폐륜 행위】 그들의 강력한 요구와 흉계에 빠져 왕은 아우와 형을 죽이고 또 모후[異生母] 인목대비를 폐하여 서궁에 가두는 패륜 행위를 하여 이때문에 훗날 결국 폐위를 당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치적】 하지만 왕은 한편으로 서적의 편찬과 간행, 전란 후 사고의 정비, 무사 만인을 시취하여 군사를 장려한 것 등 더욱 밖으로 국경 방비와 외교에 항상 용의주도한 조처를 행하였으니, 이는 모두 왕의 훌륭한 치적이라 하겠다.

【호인(胡人)의 발흥】 이보다 앞서 만주에는 건주 호인(야인)의 누르하치란 자가 일어나 건주(근거는 지금의 흥경노성)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부족을 차차 통일하고 명나라의 변경을 침략하더니 광해군 8년에는 지금의 흥경노성에서 드디어 자립하여 후금국 한(汗)이라 일컬었다. 명에서는 이를 듣고 장병을 보내어 쳐들어갈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삼각관계가 형성되어 입장이 매우 곤란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강홍립 등을 보내어 명을 돕게 하였다. 명군이 패하자 강홍립 등은 적진에 통고하여 조선의 출정이 부득이하였다는 것을 표하고 그 무리와 함께 후금에 항복하였다.

그 후 후금국 군이 요동을 함락하자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가도(철산)에 진을 베풀고 요동을 정복하려 하여 조선과 긴밀한 연락과 활약을 취하려 하니 조선의 사정은 더욱 곤란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광해군은 박엽이란 지략이 깊은 사람을 평안감사에 임명하여 그곳에서 오랫동안 국경을 엄히 방비하는 한편 후금의 내정을 정탐하게 하여 조정과 연락을 긴밀히 하였으므로 광해군 당시에는 후금이 조선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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