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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세의 후기(국기 4058-4243년, 영조 원년-순종 말)
  • 제7장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 2. 청국 세력의 침입과 갑신정변

2. 청국 세력의 침입과 갑신정변

【민씨 일파의 사대주의】 대원군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청국의 원조를 빌린 민씨 일파는 처음의 자립책을 버리고 사대주의를 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청국의 제도를 본받아 통리 아문을 베풀고 독일 사람 목인덕을 내아문에, 청나라 사람 마건충을 외아문에 두어 각각 고문관을 삼는 동시에 청의 전권 대신 이홍장의 절제를 받게 되었다. 이어 청나라 장수 오장경, 원세개 등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경성에 와서 머무르니 마치 청국의 속국 같이 되었다.

【수구당과 독립당】 이로부터 국내에는 사대당인 수구당과 개화당인 독립당의 두 파가 생겨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수구당은 말할 것도 없이 청국에 의뢰하자는 사대주의파로 대개 종실과 외척(민씨)이 이에 속하고 독립당은 일본의 힘을 빌려 자주의 신국가를 만들겠다는 개화파로, 군란 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박영효 이하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이 그 파의 주요한 인물들이었다.

이들 개화독립당 인물들은 대개 나이가 젊고 기운이 팔팔한 능력이 있는 무리였으므로 매양 일본에 왕래하여 새 제도, 새 학술을 강구하는 동시에 그 신문명을 수입하여 모든 낡은 것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청국의 세력과 이를 배경으로 한 수구당을 제거하지 않고는 그들의 이상에 도달할 수 없었으므로 먼저 수구당 일파를 때려 부셔 임금을 자기들 편으로 옮겨 올 음모를 비밀리에 행하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병력이 필요하므로 그들은 미리 일본 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 다케조에 이치로)과 비밀리에 의논하고 그 군대의 힘을 빌기로 하였다.

【우정국 사건】 그리하여 거사는 고종 21년 갑신년(국기 4217년, 서기 1884년) 11월 17일(양) 우정국(체신 사무를 맡은 관청) 낙성식이 열릴 그 때 그 장소로 정하였다. 이 낙성식에는 수구당이 중요한 인물과 기타 외국인의 고관들이 참석하게 되었으므로 혼잡한 그 틈을 타서 자객을 들여보내놓고 잔치가 한참 벌어질 판에 이웃집에 불을 질러 불이 났다고 외치자 모였던 손님들은 놀래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자객은 이때 수구당의 괴수 민영익을 찔렀으나 그는 부상당한 채로 도망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짓말로 청나라 군사들이 난을 일으켰다 하고 고종을 모시고 경우궁(지금의 휘문중학 부근)으로 옮겨 일본 군사로서 궁을 호위한 후 【개화당의 입각】 수구당의 영수인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등 6인을 죽이고 그들이 꿈꾸던 신내각을 조직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병】 이튿날 왕이 창덕궁으로 돌아오고 일본 병사가 파수를 보자 수구당은 남대문 밖에 있는 원세개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에게 군사를 이끌고 궁성에 닥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일본병과 포화를 바꾼 나머지 일본군은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이에 이르자 왕은 사관생도에게 업혀 홍영식, 박영호 등의 보호 속에 북묘로 피난하였는데 청병이 몰려와 홍영식과 박영효를 죽이고 왕을 모셔갔다. 이 난중에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그 거류민의 살상도 있었다. 【개화당의 일본 망명】 일이 모두 틀어지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개화당의 유신 계획은 일장춘몽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를 갑신정변이라 한다. 이 거사는 결국 철저하지 못했던 개화당의 계획과 일본 공사의 무력으로 원조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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