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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편 최근(국기 4243-4278년, 서기 1910-1945년)
  • 제1장 민족의 수난과 반항

제1장 민족의 수난과 반항

【해외 망명】 한일합병의 조서가 내려지자 신문의 논조를 엄중히 누르며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이면 모두 잡아 가두고 정치 연설과 집회를 일절 금하며 우리 동포는 오직 숨만 겨우 쉴 지경에 이르렀다. 분함을 참다못하여 해외로 망명한 지사들도 많았고 혹은 나의 피를 스스로 흘려 이 더럽혀진 역사를 씻으려고 자살한 선비, 관리, 학생들도 많았으며 또 사내(寺內, 데라우치) 통감과 한국 고관의 암살 음모와 지방 소요도 있었으나 일본의 자심한 압박으로 차츰 평정되어가는 듯하였다. 총독 관제가 발포되고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되어 무단 정치를 실시하고 언론 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뺏어 불평분자라고 인정하면 모조리 잡아 가두고 신문의 발행도 정지시켰다.

이와 같이 눈, 귀, 입을 틀어막으니 우리 민족은 어둠속에서 헤매었으며 정치상, 사회상의 불평은 날로 높아갔다. 그러나 혹독한 압박 아래에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망명 지사 활동】 몇몇 지사들은 큰 뜻을 품고 미국, 러시아령의 연해주 혹은 중국 상해 등지로 망명하여 그곳을 근거삼아 국권의 회복을 꾀하였다. 서기 1914년 7월에 제1차 구주대전이 일어나고 1917년 8월에 스웨덴의 서울인「스톡홀름」에서 만국 사회당 대회가 열리자 대표를 보내어 조선의 독립을 요망하였으며 그해 9월에 미국 「뉴욕」에서 약소민족 25국 회의가 열리자 또 대표를 보내는 등 망명 투사의 운동은 자못 믿음직하였다. 제1차 구주대전은 독일의 굴복으로 끝이 나고 그 때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부르짖으니 온 세계의 약소민족은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국권 회복 운동】 이때를 당하여 우리 민족은 내외에서 호응하여 힘을 모으더니 드디어 일본 정부, 귀·중 양원(貴衆兩院), 정당 수령, 조선 총독에게 『합병 후 조선인 일반은 일본정치에 복종하지 않으며 그 다스림을 받고자 하지 않으니 국권을 돌려보내라』는 글을 보내고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하여 「평화를 기초로 한 새 세계가 건설되려는 오늘날 조선만이 일본의 압박 정치 아래 있음」을 하소연하기로 하여 일대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3·1 운동】 즉 민족대표 손병희 33인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기타 여러 단체 내지 학생, 귀족 등과 연락하여 서기 1919년 기미년 3월 1일에 서울 탑골공원에서 수십만의 대중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며 일대 시위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전국이 호응하여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일어나 한때 굉장한 기세를 보였다.

일본은 군대로 이들을 누르려 하였으나 여러 곳에서 민중과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더욱이 수원군 향남면에서는 일본의 방화와 발포로 잔인한 학살이 있었다. 이것을 3·1 운동 또는 기미만세사건이라 하며 이 소동의 여파는 여러 해를 두고 움직이게 되었고 많은 지사가 옥중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임시 정부 수립】 이 사건을 기틀로 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어 본부를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에 두고 끊임없이 내외와 연락하여 좋은 기회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미운동은 비록 열국에 호소하여 독립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우리 민족 각성에 큰 힘을 주었다. 언론, 종교계 등 모든 지식인은 민족 자립의 기초는 민족문화의 향상에 있음을 깨닫고 교육 진흥, 물산 장려 등의 운동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사건 후 무단정치는 물러가고 재등실(齋藤實, 사이토 마코토)이 총독으로 와서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우고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는 등 약간 어루만지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식민지 정책이 변할 수 없어 여러 번 총독이 바뀌는 동안에 교육, 행정 등 모든 방면에 차차로 좀먹어 들기 시작하여 터무니없이 우리 겨레를 자기네에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우리 민족이 이 흉한 꾀에 넘어가지 않았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폭탄 사건】 이와 같은 압박 속에서도 상해 임시정부가 보낸 의열단원 나석주는 우리의 기름진 땅을 긁어먹던 경성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며(서기 1926년) 성주 사람 장진홍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서기 1927년) 잠들려던 민중을 깨우쳤다.

【광주 학생 사건】 서기 1929년 11월에는 광주에서 기차 통학을 하던 조·일 중학생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이것이 단서가 되어 마침내 전조선 학생의 집단적 시위 운동이 벌어졌다. 이때를 타서 사회주의 선배들의 지도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129학교의 젊은 생도가 이에 가담하여 그 이듬해 2월까지 계속하였다.

【신간회 운동】 그동안 사회주의의 지하 활동도 눈부시게 전개되어 부분적인 경제적 투쟁에서 정치 운동으로 옮기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합동하여 민족 단일 전선으로서 신간회의 창립을 보게 되어 3만 여의 회원을 가지게 되었다.

서기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더니 그들은 우리에 대한 압박과 간섭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해외의 투사들은 중국의 항일 반만 운동과 손잡고 활발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임시정부 김구가 보낸 이봉창은 서기 1932년 1월 8일에 일본 국왕을 그 궁성 영전문(櫻田門) 밖에서 저격하였다. 그해 4월 29일에는 윤봉길이 일왕 생일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중국을 좀먹던 괴수 백천(白川,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즉사하게 하고 주중 대사 중광(重光, 시게미쓰 마모루)과 해군 중장 야촌(野村, 노무라 기치사부로) 등을 부상하게 하여 한때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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