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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째 가름 근세조선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둘째 조각 유교가 진흥한 까닭은 무엇이며 사화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 ③ 사화가 일어난 원인 및 진전과 그 국가·민족에게 미친 영향은 어떠하였는가?

③ 사화가 일어난 원인 및 진전과 그 국가·민족에게 미친 영향은 어떠하였는가?

국가가 오래 태평 무사하고 문화의 꽃이 찬란함에 따라 국민의 사조가 차차로 문약으로 흐르는 기상이 보이고 이것이 성종 말년 무렵에는 더욱 농후하여 가더니 성종의 아들 연산군의 실정으로 인하여 그만 표면화되었다. 이어서 사화까지 일어났으니 국운은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사화의 시초는 귀족계급을 중심으로 한 어용학자파와 영남의 선비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유림파 사이의 사상·감정의 차이와 정권의 쟁탈로서 일어난 대립이다. 이는 결국 연산군의 유교에 대한 반동을 이용하여 드디어 폭발한 것으로 무오사화(단기 3831년, 1498년)가 그 처음이다. 이때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이하 수많은 선비가 희생을 당하였다.

이 뒤에도 이와 유사한 사화가 여러 번 일어났으니 연산군 생모의 폐사 사건으로 일어난 갑자사화, 조광조 일파의 급격한 정치 개혁으로 일어난 기묘사화[중종 14년, 단기 3852년, 1519년], 대윤과 소윤의 정쟁으로 일어난 명종 때의 을사사화(단기 3878년, 1545년) 등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의 사화로 인해 조정의 관리들은 공보다 사를 먼저하고 나라 일보다 편당을 중하게 여겼으므로 따라서 정치가 그릇되어 법강이 문란하고 인심이 불안에 빠졌다. 그러나 이를 바로잡을 만한 정치가가 없었으며 부패한 정치계는 더욱 틀려가더니 얼마 가지 않아 이 사화보다 더 무서운 당쟁을 빚어내고 말았다.

 [익힘]

1. 사화가 일어난 시초는 어떠하였는가?

2. 사화는 국가 사회에 어떻게 나쁜 영향을 끼쳤는가?

3. 이 사화의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배웠으며 어떻게 자각하여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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