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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덟째 가름 최근세의 나라 사정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첫째 조각 흥선대원군은 어떤 정책을 썼으며 일본 침략의 첫 손은 어떻게 들어왔고 구미 열국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 ② 불·미 양군과는 어째서 충돌하게 되었으며 그 뒤의 대외 정책은 어떠하였는가?

② 불·미 양군과는 어째서 충돌하게 되었으며 그 뒤의 대외 정책은 어떠하였는가?

철종 말년 천주교의 금단이 적이 누그러지자 이에 다시 천주교 세력을 펴기 시작하더니 서양인의 선교사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전도에 종사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국제관계에 눈이 어둡고 또 천주교에 대한 감정도 좋지 못하여 고종 3년(단기 4199년, 1866년) 천주교도인 남종삼 등과 프랑스 신부의 거의 전부를 죽이고 전국에 명령하여 수많은 교도를 학살하였다.

이 소식이 당시 천진에 있는 프랑스 파견함대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군함 10척을 끌고 강화도에 침범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용희·한성근·양헌수 등으로 막게 하여 크게 승리를 얻자 적은 할 수 없이 강화도에 불을 놓고 귀중한 서적을 훔쳐 가지고 도망하였다. 이것이 곧 “병인양요”이다.

우연히 또 이 해(단기 4199년, 1866년) 여름에 아메리카 상선이 상품을 팔기 위하여 대동강에 들어와서 물러가지 않고 이를 거절하는 우리 관민에게 폭행을 가하며 또 양식을 얻기 위하여 약탈을 감행하므로 평양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그 배를 불태우고 뱃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이 뒤에 아메리카 정부에 전해지자 고종 8년(단기 4204년, 1871년)에 미국 정부의 훈령으로 당시 중국에 주재하고 있는 아시아 함대 5척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이곳을 공략하려 하므로 어재연 이하 여러 장병이 잘 싸우자 미군도 할 수 없이 물러갔다. 이것이 곧 “신미양요”이다.

대원군은 이렇게 두 번이나 양인에게 이기자 외국인은 하잘 것이 없다 속단하고 이에 쇄국정책을 굳게 하여 적극적으로 외국인을 배척하였다. 그 결과 국민들은 외국 사정에 귀와 눈이 멀어지게 되었고 동시에 새 문명의 진보 발달을 크게 지연하게 하였다.

【대원군은 양인을 물리친 뒤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에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계하노라.(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이라고 새긴 척화비를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 중요한 곳에 세워 척화·척양을 굳게 하였다.】

 [익힘]

1. 두 차례의 양요가 일어난 원인은 무엇인가?

2. 대원군은 외국에 대하여 어떤 정책을 썼으며 그 결과는 어떤 해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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