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친밀하게 지내고 또 이를 중간에서 주선하고 있는 민씨 일파를 대원군을 비롯하여 수구파들이 매우 괘씸하게 여기더니 19년 임오년(단기 4215년, 1882년) 6월에 13개월 동안이나 밀린 구식 군대의 급료를 겨우 한 달 치 지급하였는데, 그 양도 부족한데다가 모래까지 섞여 있었으므로 극도로 분노한 구식 군대들은 드디어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곧 “임오군란”이다.
반란군은 무기의 창고를 파괴하고 무기를 끄집어내어 민씨네의 집을 습격하고 일본 교관 굴본예조를 죽이려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자 화방의질이 스스로 공사관에 불을 놓고 달아났다. 반란군은 또 대궐에 들어가서 급료의 책임자인 민겸호를 죽였다. 이에 명성황후는 난을 피하여 충주로 옮겨갔으나 반란군의 형세는 갈수록 맹렬하였다.
10년 동안 세도를 잃었던 대원군이 이 기회에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민씨에게는 여간 큰 타격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천진에 있는 김윤식을 통하여 청국에 호소하여 청장 오장경·정여창 등이 달려와서 대원군을 붙들어가게 하였다. 쫓겨 간 화방의질은 군함을 끌고 와서 억지로 제물포 조약을 맺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그에게 배상금을 물어주고 수신사 박영효를 보내어 사과의 뜻을 표하게 하였다.
임오군란 뒤 민씨 일파는 사대주의를 취하여 청국의 세력에 의존하려 하였으며 청장 오장경·원세개 등이 3천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 와 있게 되었으므로 이로부터 국내에는 개화당과 수구파의 알력이 갈수록 심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