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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덟째 가름 최근세의 나라 사정과 그 사회생활은 어떠하였는가?
  • 넷째 조각 러·일은 어떻게 세력을 다투었으며 우리나라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 ② 대한제국이 될 때까지는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가?

② 대한제국이 될 때까지는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가?

명성 황후의 참변과 단발령이 국민의 마음을 크게 격동시켜 춘천을 비롯하여 경기·강원·충청·경상 등 여러 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서울의 군대가 많이 지방의 의병을 토벌하러 나갔다.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는 이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다시 잡을 계획을 꾸몄다.

건양 원년(단기 4229년, 1896년) 2월[이하 양력을 씀]에 러시아 공사가 서울이 허술하니 공사관의 안전이 염려된다고 선전하며 수군 100명을 인천으로부터 서울에 입성시키고 별안간 고종과 태자를 비밀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시니, 이것이 곧 “아관파천[露館播遷]”이다. 이때 김홍집·정병하·어윤중 등 친일파의 중신이 많이 죽었으며 박정양이 총리대신이 되어 단발령과 개화의 새 법을 많이 철폐, 고종은 일 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있다가 이듬해 2월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겼으며 건양의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국호를 대한이라 정하였다. 이 해 10월 12일 고종은 황제의 위에 나아가서 대한 국제 9조를 발표하였다.(단기 4230년, 1897년)

개혁에 따라 국내의 공기는 점차 자주적 정신으로 돌아와서 미국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한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조직되고 또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정부의 잘못을 붓으로 입으로 공격하며 옛날 중국의 사신을 환영하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크게 기세를 올렸다. 정부에서는 황국협회를 조직시켜 독립협회에 대항하였으며 팔도의 보부상을 끌어들여 서대문에서 독립협회와 충돌시켜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고종이 친히 설득하여 원만히 귀결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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