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1권)
  • 동국역사 권1(삼국기(三國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 무오(戊午) [418년]

무오(戊午) [418년]

【신라 눌지왕 원년 ○ 고구려 장수왕 5년 ○ 백제 전지왕 13년 ○ 동진 안제 의희 14년 ○ 일황 윤공 7년 ○ 서력 기원 418년】

가을에 신라(新羅) 박제상(朴堤上)이 일본(日本)에 이르러서 살해되었다. 처음에 신라 왕에게 2명의 아우가 있었으니,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이었다. 복호는 고구려(高句麗)에 인질로 보냈고, 미사흔은 일본에 인질로 보냈는데, 왕이 2명의 아우를 보고 싶어 했다. 먼저 박제상을 고구려에 보내어 설득하여 복호를 돌아올 수 있도록 하였다. 얼마 후 왕이 또 미사흔을 생각하면서 박제상에게 말하기를, “나의 두 아우는 곧 좌우의 팔과 같다. 지금 한쪽 팔만 얻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박제상이 대답하기를, “신은 이미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어찌 작은 수고로움을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그러나 고구려는 그 왕이 현명하여 신이 한마디 말로 깨우칠 수 있었지만, 일본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계략을 세워서 속여야 합니다. 지금 신이 떠나거든 왕께서는 곧 신과 미사흔의 가속(家屬)을 붙잡아 가두십시오. 신이 대왕께 죄를 지은 것과 같이 하시면 신이 계책을 내어서 미사흔을 돌려보내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계책을 따라서 박제상이 일본에 이르니, 일본 왕이 과연 의심하였으나 그의 가속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듣고는 박제상이 신라를 배반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곧 장수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출진시켜 장차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에 박제상과 미사흔을 길 안내자[鄕導]로 삼아서 섬[海島]에 이르렀다. 이때 박제상이 미사흔에게 몰래 돌아갈 것을 권하니 미사흔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자네를 버리고 홀로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박제상이 말하길, “만일 공자(公子)를 구출하여 대왕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제가 어찌 제 한 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미사흔이 눈물을 흘리며 인사하고 도망하여 돌아갔다. 얼마 후 일본이 미사흔이 도망갔다는 것을 듣고 탐색군을 보내서 사방에서 추격할 때에 안개[烟霧]로 인해 어두컴컴해서 붙잡지 못하였다. 이에 일본 왕이 박제상을 잡아 심문하니 박제상이 말하기를,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우리 국왕의 뜻을 이루고자 한 것인데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일본 왕이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네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 지금 계림의 신하라고 하니 어찌된 까닭인가. 네가 만일 일본의 신하가 된다면 많은 녹봉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박제상이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계림의 회초리를 받을지언정 일본의 관직과 녹봉은 받을 수 없다.”고 말하니, 일본 왕이 더욱 화를 내면서 박제상의 다리 가죽을 벗기고 베어 낸 억새와 갈대 위를 걸어가도록 하였다. 또한 뜨겁게 달군 쇠 위에 세워 놓고 심문하니, 박제상이 말하기를, “계림의 신하이다.”라고 하였다. 일본 왕이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에 태워 죽였다. 신라 왕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며 곧 대아찬(大阿飡)【관등명】에 추증(追贈)하고, 그의 가족에게 후히 보답을 하였으며, 미사흔에게 그의 둘째 딸과 혼례케 하였다. 이에 앞서 미사흔이 돌아왔을 때에 왕이 6부에 명령하여 교외까지 나가 맞이하도록 하였다. 왕이 미사흔을 만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술을 따라 극진히 환영하였는데, 그때 「우식곡(憂息曲)」을 지어서 위로하였다. 박제상의 아내가 3명의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경주(慶州)에 있다.】에 올라가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박제상은 파사왕(婆娑王)의 5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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