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1권)
  • 동국역사 권1(삼국기(三國記)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 임인(壬寅) [642년]

임인(壬寅) [642년]

【신라 선덕 여왕 10년 ○ 고구려 영류왕 24년 ○ 백제 의자왕 원년 ○ 당 태종 정관 16년 ○ 일황 황극(皇極) 원년 ○ 서력 기원 642년】

이에 앞서 고구려(高句麗) 태자 환권(桓權)이 당(唐)나라에 이르니, 당나라 황제가 낭중(郎中) 진대덕(陳大德) 등을 보내서 답방[報聘]하게 하였다. 이때 진대덕이 산수를 유람하겠다고 말하고는 산과 강, 도로와 마을의 험난함과 평탄함을 모두 탐색하여 살펴보고 돌아가서 고구려의 허실(虛實)을 모두 갖추어 진언하였다. 이에 당나라 황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뜻을 갖게 되었다.

○ 겨울 10월에 고구려 천개소문(泉蓋蘇文)이 그의 왕 건무(建武)1)원문에는 달무(達武)로 되어 있으나, 영류왕을 의미하므로 건무(建武)로 바로잡는다.를 시해하고 왕의 조카 장(臧)을 옹립하니, 그가 보장왕(寶藏王)이다. 천개소문은 용모가 웅장하고 장대하였으며, 기상은 억세고 사나웠다. 그 아비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東部大人)이 되니 여러 대인이 그의 흉악함을 증오하여 왕과 함께 일을 꾸며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천개소문이 부병(部兵)을 매복시키고 여러 대인 1백여 명을 불러 연회를 베풀면서 모두 죽였다. 곧바로 궁으로 들어가서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관직명이니, 즉 병부 상서(兵部尙書)이다.】가 되어서 국사(國事)를 제멋대로 처리하였다. 몸에는 항상 5개의 칼을 차고 다녔으며, 출입할 적에는 반드시 귀인(貴人)이나 무장(武將)을 땅에 엎드리도록 하고 발로 그 위를 밟고 말 위에 올라탔고, 말에서 내릴 때에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 11월에 신라(新羅)가 이찬(伊飡) 김춘추(金春秋)를 보내서 고구려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백제(百濟)가 신라 서쪽 지역 미후(獼猴) 등 40여 개 성을 함락하고 또한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陜川)】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는데 신라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이 전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킬 뜻이 있었다. 그가 장차 떠날 때에 김유신과 함께 돌아올 기한을 60일로 정하고, 드디어 고구려 왕에게 가서 설득하여 말하기를,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우리의 영토를 여러 차례 침범하니, 원컨대 대왕의 위엄에 의지하여 복수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고구려 왕이 말하기를, “마현(麻峴)과 죽령(竹嶺)【지금의 단양군(丹陽郡) 남쪽 지역】은 원래 우리의 영토이다. 만일 돌려준다면 곧 병사를 보내 서로 도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춘추가 대답하기를, “신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요청하러 온 것인데, 지금 대왕께서는 어려운 이웃을 구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영토를 돌려달라 하시니 신이 죽을지언정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고구려 왕이 노하여 잡아 가두었다. 김춘추가 청포(靑布)를 고구려 왕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뇌물로 주고, 또한 고구려 왕에게 서신을 보내서 말하기를, “마현과 죽령은 본시 귀국의 영토입니다. 지금 신이 돌아가서 이 지역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곧 하늘의 해가 위에 있는데, 원컨대 왕은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에 김유신이 김춘추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왕께 청하여 병사 3천을 소집하여 고구려를 장차 공격하려고 한강(漢江)을 건너니, 고구려 왕이 신라가 병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김춘추를 후한 예로 돌려보냈다. 김춘추가 경계 밖으로 나와서 환송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한 나라의 영토는 사신(使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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