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 출제 개운 4년 ○ 일황 촌상(村上) 원년 ○ 서력 기원 947년 ○ 이 해에 후진(後晋)이 거란에게 멸망당하고, 후한(後漢) 고조(高祖)1)원문에는 고제(高帝)로 되어 있으나, 고조(高祖)로 바로잡는다.가 황제를 칭하였다】이었다.
가을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였다. 처음에 최언휘(崔彦撝)의 아들 최광윤(崔光胤)이 진(晉)나라에서 유학하다가 거란[契丹]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재주와 식견으로 등용되었다. 그때 거란이 고려(高麗)를 침범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서신을 보내 조정에서 알도록 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군사 30만을 선발하여 ‘광군(光軍)’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