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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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戊午) [현종 9년]

【송 진종 천희(天禧) 2년 ○ 일황 후일조(後一條) 2년 ○ 서력 기원 1018년】이었다.

여러 도(道)의 안무사(按撫使)를 없애고 4도호(都護)와 8목(牧) 그리고 지주군사(知州郡事) 56명과 진장(鎭將) 28명, 현령(縣令) 20명을 두었다.

○ 5월에 승려 10만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이때로부터 해마다 항상 시행하였다.

○ 가을 9월에 거란 대장[契丹大將] 소손녕(蕭遜寧)이 갑사(甲士) 10만 명을 거느리고 침략해 왔다. 이에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上元帥)에 임명하고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서 군사 20만 8천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때 흥화진(興化鎭)【지금의 의주(義州)에 속해 있다.】에 이르러서 산속에 매복을 두고 또한 큰 밧줄로 소가죽을 엮어서 큰 냇물을 막았다. 얼마 후에 적이 이르자 곧바로 막은 물을 터트리고, 매복한 병사들 또한 나아가서 소손녕을 크게 물리쳤다. 소손녕이 감히 맞서지 못하고 곧 사잇길을 통해 개경[京城]으로 곧바로 달려 나갔다. 그 다음해(1019) 봄 정월에 강감찬이 병사를 보내 들어가서 지원하고, 개경의 병사들 또한 엄히 방비하여 기다리니, 소손녕이 공략하지 못할 것을 알고 회군하여 귀주(龜州)에 이르렀다. 이에 강감찬 등이 또한 맞이하여 싸우는데, 비바람을 이용해서 힘써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이에 시신이 들판을 덮고 포로와 말, 낙타, 갑옷, 병기 등 노획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소손녕이 도망쳐 가니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강감찬이 개선하여 돌아오니 왕이 친히 성 밖까지 나아가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금으로 만든 꽃 여덟 가지를 강감찬의 머리 위에 꽂아 주었다.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 왼손으로는 강감찬의 손을 잡으며 위로하길 그치지 않았다. 얼마 후에 강감찬이 나이가 들어 물러날 것을 청하니 의자와 지팡이[几杖]를 하사하고 3일에 한 번 조회하라고 하였다. 또 문하시랑(門下侍郞) 동내사 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을 제수하니 식읍이 300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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