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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丙午) [인종 4년]

【송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 ○ 일황 숭덕 3년 ○ 서력 기원 1126년】이었다.

이자겸(李資謙)이 병사를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였다. 처음에 이자겸이 외척(外戚)이라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권력을 휘두르자 중서시랑(中書侍郞) 한안인(韓安仁)이 왕에게 권하여 이자겸을 높이 받들어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가 권세가 없는 틈을 타서 문공미(文公美) 등과 함께 그를 없앨 계책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이자겸이 그 모의를 눈치 채고 곧바로 죄를 조작하여 연루시켜 한안인을 감물도(甘物島)【지금의 영암(靈巖)에 속해 있다.】로 유배 보냈다가 물에 빠뜨려 죽였다. 또한 문공미는 충주(忠州)로 유배 보냈으니, 한꺼번에 이 일에 연루되어 유배 간 유명 인사가 매우 많았다. 이후로부터 내외의 권력이 모두 이자겸에게 돌아가고, 척준경(拓俊京)과 그의 아우 척준신(拓俊臣)이 그를 보좌하였다. 이자겸이 다른 성씨가 왕비가 되면 권력이 나뉘어질까 두려워 억지로 그의 셋째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고 그 이후에 또다시 그의 넷째 딸을 시집보내 왕비로 삼으니 왕이 모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이에 이자겸이 더욱 꺼리거나 눈치 볼 것이 없어서 따르는 무리를 넓게 포진시켜 주요 요직을 장악하였다. 또한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아서 뇌물이 넘쳐났으며, 또 국정을 멋대로 관장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왕이 그를 증오하였는데, 내시관(內侍官)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이 왕의 뜻을 헤아려 알고 동지 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과 함께 이자겸과 척준경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때 군사를 일으켜서 척준신을 먼저 죽이니, 이자겸이 두려워하여 모든 신하를 불러 모아 의논코자 하였다. 이에 척준경이 “상황이 매우 시급하다.”고 하고는 궁궐에 들어가서 무리를 거느리고 북을 치며 소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지녹연 등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는데, 날이 저물자 척준경이 땔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지르니 왕이 불을 피하여 산호정(山呼亭)에 걸어서 도착하였다. 이때에 왕이 해를 입을 것이 두려워 이자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니 이자겸이 중의(衆意)가 합쳐지지 않았음을 알고는 감히 왕위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왕에게 청하여 남궁(南宮)으로 나아가 머물도록 하고 그 무리를 나누어 보내서 안보린 등 10여 명을 죽였다. 지녹연과 김찬은 먼 곳으로 유배 보냈는데, 지녹연은 가는 길에 죽였다. 난이 일어났을 적에 좌복야(左僕射) 홍관(洪灌)이 변란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한데 내가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왕을 따라서 서화문(西華門)으로 나아갔다가 척준경 등에게 해를 당했고, 밀직(密直) 김진(金縝)1)원문에는 김전(金塡)으로 되어 있으나, 김진(金縝)으로 바로잡는다.은 “의로운 사람은 역적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라고 하고는 결국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다.

○ 3월에 이자겸이 왕을 겁박하여 자기 집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하였다. 그때에 왕이 이자겸 집에 이르니 이자겸이 그의 처와 함께 땅을 치며 크게 울면서 말하기를, “왕은 어찌하여 역신(逆臣)을 믿고 같은 혈육을 해하고자 하였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왕의 거동과 음식을 모두 자유롭지 못하게 하였으며, 재상 박승중(朴昇中)과 허재(許載) 등은 역적 무리에게 아첨하여 붙었고 모든 관료는 정원만 채웠을 뿐이었다.

○ 5월에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옮겨 머물렀다.

○ 척준경이 이자겸을 가두었다. 이때에 이자겸의 권세가 갈수록 치성하였으므로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이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이자겸이 제 맘대로 날뛰는 것은 오직 척준경을 믿기 때문이니 만일 척준경을 얻으면 병권(兵權)이 왕에게 속하게 되어 이자겸을 쉽게 제거할 것입니다.”라고 하고 곧바로 척준경을 찾아가 설득하여 왕실을 위해 힘을 쓰라고 하였다. 또한 왕이 손수 쓴 조서를 내리니 척준경이 몹시 슬퍼하며 응하여 따르므로 왕이 척준경에게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제수하였다. 어떤 모임에서 이자겸의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와 함께 서로 헐뜯다가 마침내 척준경의 죄악을 열거하니 척준경이 크게 노하여 드디어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졌다. 또한 이자겸이 십팔자(十八子)의 참언을 믿고 역모[不軌]를 도모하여 떡에 독약을 넣어서 왕께 올렸는데, 왕비 이씨(李氏)가 몰래 이를 왕에게 알렸다. 이에 왕이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 주니 까마귀가 즉사하고 또한 독을 탄 약을 왕에게 올렸으나 왕비가 그릇을 받들다가 일부러 땅에 넘어지니 왕비는 이자겸의 넷째 딸이었다. 이에 왕이 손수 쓴 서신을 척준경에게 보내 이자겸을 제거할 것을 도모하라고 하니, 척준경이 드디어 상서(尙書) 김향(金珦)과 함께 이자겸을 잡아 팔보관(八寶關)에 가두었다. 왕이 이자겸을 영광군(靈光郡)으로 유배 보내고 그의 나머지 무리는 먼 곳으로 나누어 유배 보냈으며, 척준경을 태사 문하시랑평장사(太師門下侍郞平章事)에 임명하였다.

○ 두 왕비 이씨를 폐위하고 임씨(任氏)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간관(諫官)이 아뢰어 말하기를, “두 왕비가 왕에게는 이모의 항렬이니, 왕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어쩔 수 없이 두 왕비를 내보냈다. 그러나 자신을 구해 준 은의(恩義)를 생각해서 하사한 것이 매우 많고, 총애하고 그리워함이 매우 두터웠다.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임원후(任元厚)의 딸을 맞이하였다.

○ 가을 7월에 송(宋)나라가 사신을 보내 금(金)나라가 침략한 것을 알리고 또한 군사를 보내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왕이 나라가 작고 군사가 약하다는 것을 이유로 예를 갖추어 사양하고 따르지 않았다.

○ 12월에 이자겸이 유배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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