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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甲午) [명종 4년]

【송 효종 순희(淳熙) 원년 ○ 일황 고창 6년 ○ 서력 기원 1174년】이었다.

봄 정월에 중원(重元) 귀법사(歸法寺) 등의 승려 수천 명이 이의방(李義方)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의방이 병사들을 보내서 승려 1백여 명을 죽이고 여러 절을 불태우고 그릇을 모두 빼앗았다. 이에 이의방의 형 이준의(李俊儀)가 질책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세 가지 큰 잘못을 했으니, 왕을 죽인 것이 그 첫 번째이고, 태후의 여동생을 겁간한 것이 두 번째이며, 국정을 제멋대로 한 것이 세 번째이다.”라고 하였다. 이의방이 화를 내며 칼로 치니 이준의가 도망가서 화를 면하였다.

○ 3월에 이의방이 그의 딸을 바쳐서 태자비로 삼고 이로부터 더욱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 가을 9월에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다른 뜻을 품고 서북 양계(兩界)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말하기를, “들으니, 개경에서 북방의 여러 성이 사납다고 하여 많은 병사를 보내 토벌한다고 하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도륙을 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절령(岊嶺)【즉 자비령(慈悲嶺)이며, 지금의 서흥(瑞興)에 있다.】 이북 40여 성이 모두 호응하였다. 드디어 조위총이 서경(西京)을 근거지로 삼고 정중부(鄭仲夫) 등이 왕을 시해한 죄를 물어 토벌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 평장사(平章事) 윤인첨(尹鱗瞻)에게 명하여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패하고 돌아왔다. 조위총이 승리한 기세를 몰아 개경[京師]까지 곧바로 향하니 이의방이 병사를 보내 돌격하여 대동강(大同江)까지 쫓아갔으나 한 달 남짓 서로 버티다가 다시 패하고 돌아왔다.

○ 연주(延州)【지금의 영변(寧邊)】 사람 현덕수(玄德秀)가 서경 군사를 쳐서 물리쳤다. 조위총의 격문이 이르니 여러 성이 모두 호응하였다. 현덕수가 주장(州將)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조위총이 남을 해칠 마음을 품고 왕명을 거역하니 충의(忠義)를 품은 자가 어찌 차마 이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 드디어 주장과 함께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이때 성안의 인심이 흉흉하였으므로 현덕수가 맹주(孟州)【즉 맹산(孟山)】 장리(將吏)의 서신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성밖의 사람을 성안으로 투입하였는데, “개경의 병사 10만 명이 이미 철령(鐵嶺)【강원도 회양(淮陽)과 함경도 안변(安邊)과 인접한 큰 고개이다.】을 넘어서 서경을 공격하려고 하니 각 주진(州鎭)은 견고하게 지키며 기다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성안에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얼마 후에 북면 병마사(北面兵馬使) 차운규(車雲圭)가 운주(雲州)【지금의 운산(雲山)】 사람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현덕수가 그의 아우 차이후(車利厚)와 함께 병마사의 권한을 임시로 수행하면서 공격해 오는 서경의 군사를 격퇴시켰다. 그리고 조위총과 서북 여러 성에서 항복을 권하기 위해 보낸 사자들을 모두 효수하여 백성 앞에 내걸었다.

○ 이의방이 형벌을 받아 죽었다. 이의방이 흉악하고 방자함이 날로 심해져 함께 피해를 당한 자가 많았으므로 정중부(鄭仲夫)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두문불출하였다. 이때 이의방이 정중부의 집에 가서 부자 관계를 맹세하니 정중부가 안심하였다. 이윽고 윤인첨이 다시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서쪽 교외에서 군사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때 이의방이 선의문(宣義門)에 나타났는데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승려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고 몰래 꾀어 낸 후 이의방을 목 베어 죽이고 이준의 형제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모두 죽였다. 또한 역신의 딸을 동궁의 배필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왕에게 아뢰어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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