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2권)
  • 동국역사 권4(고려기(高麗紀))
  • 명종(明宗)
  • 계축(癸丑) [명종 23년]

계축(癸丑) [명종 23년]

【송 광종 소희 4년 ○ 일황 후조우 8년 ○ 서력 기원 1193년】이었다.

가을 7월에 남쪽 지방에서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그 중 가장 심한 자는 김사미(金沙彌)라는 자였다. 또 운문산(雲門山)에 있는 자는 효심(孝心)이라 하니 이들은 초전(草田)을 점거하고 망명한 자들을 불러 모아서 주현(州縣)을 약탈하였다. 왕이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로 하여금 장군 이지순(李至純)과 노식(盧植) 등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라고 명하였다. 이지순은 이의민(李義旼)의 아들이었다. 처음에 이의민이 십팔자(十八子)의 참설을 믿어서 분에 넘치는 희망을 품고 탐욕스럽고 비루한 옛 습관을 잠시 버리고 유명한 선비들을 등용하여 헛된 명예를 구하였다. 또 자신의 본적이 경주(慶州)라고 하여 신라(新羅)를 부흥한다고 하였으며, 김사미와 효심 등과 함께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지순이 또한 적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관군의 움직임을 누설하였으므로 관군이 가는 곳마다 번번이 패하였다. 전존걸은 원래 지략과 용맹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이에 화를 내며 말하기를, “만일 내가 이지순을 죄로 다스린다면 그의 아버지가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적이 더욱 활개를 칠 것이니, 죄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라 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얼마 후에 김사미가 항복하니 그의 목을 베었다.

○ 겨울 10월에 평장사 최세보(崔世輔)가 죽었다. 최세보가 저택을 크게 짓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들이 최충헌(崔忠獻)에게 유배를 당하고 가문이 모두 망하였다.

○ 11월이었다. 태후 기신재(忌辰齋)를 내전(內殿)에서 베풀고 공후(公侯)와 양부(兩府)의 재상, 왕을 모시는 여러 신하가 각기 여러 가지 음식을 바치니, 기일[忌辰]에 음식을 바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이의민에게 공신(功臣) 호를 하사하고 문무백관이 모두 이의민의 집으로 가서 축하 잔치를 벌였다. 이의민이 정사를 제멋대로 할 적에 뇌물을 주고받는 것이 공공연히 행해졌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연결되어 있어 조정의 신하들이 감히 누가 어떻다고 말하지 못하였다. 민가를 함부로 빼앗아서 저택을 크게 짓고 또한 백성의 토지를 빼앗았으며 여러 아들이 그 아비의 힘에 기대어 방자하게 구는 것이 더욱 심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