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보통교과 동국역사(2권)
  • 동국역사 권5(고려기(高麗紀))
  • 전(前) 폐왕(廢王) 우(禑)
  • 경신(庚申) [전 폐왕 우 6년]

경신(庚申) [전 폐왕 우 6년]

【명 태조 홍무 13년 ○ 일황 후귀산 8년 ○ 서력 기원 1380년】이었다.

봄 정월에 태후 홍씨(洪氏)가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83세였다. 태후는 행실이 어질었는데, 임종 시 우(禑)에게 대신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구경 나가는 것을 삼가도록 훈계하였다.

○ 가을 8월에 우가 도성 남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곡식을 짓밟았으며, 또 나이 어린 사람들과 어울려 마을에서 말을 타고 달리고, 민가의 닭과 개를 활로 쏘며, 길가는 아녀자를 겁탈하였다.

○ 9월에 우리 태조(太祖)가 왜구를 운봉(雲峯)에서 크게 물리치셨다. 이에 앞서 나세순(羅世巡)과 심덕부(沈德符) 등이 왜구를 진포(鎭浦)【지금의 한산(韓山)에 있다.】에서 쳐부수자, 왜구가 울분과 독기를 품고 주현(州縣)을 연달아 함락하여 삼도의 연해 지역이 모두 텅 비었다. 또 원수 배극렴(裵克廉)1)원문에는 배극렴(裴克廉)으로 되어 있으나, 배극렴(裵克廉)으로 바로잡는다., 정지(鄭地) 등이 사근역(沙斤驛)【지금의 함양(咸陽)에 있다.】에서 패하였다. 이에 적이 운봉현을 불태우고 인월역(引月驛)【지금의 운봉에 있다.】에 나아가 주둔하며 북상한다고 큰소리치니 안팎이 크게 동요하였다. 우가 태조를 양광(楊廣)【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 두 도】, 전라, 경상도의 삼도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렬(邊安烈)을 부사(副使)로 삼아 가서 토벌하라고 하였다. 태조께서 변안렬 등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적진과 수십 리 떨어져 있었다. 태조께서 길 왼쪽에 있는 험한 길을 보시며 말하시기를, “적이 반드시 이 길을 경유해서 우리를 기습할 것이다.”라 하시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큰길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태조께서 직접 그 험한 길에 들어가셨는데, 적군이 과연 그 길에 매복하고 있었다. 태조께서 적 5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이시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기시니, 적이 험한 곳을 점거하여 지키고 있었다. 태조께서 여러 군사를 지휘하고 독려하며 위로 공격하실 때에 날아든 화살이 태조의 왼쪽 다리에 명중하였다. 태조께서 화살을 뽑으시고 의기가 더욱 강해지시니,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감동하여 각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적 가운데 아지발도(阿只拔都)라는 자는 나이가 겨우 15, 16세였다. 그러나 날쌔고 용맹함이 비교할 자가 없었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돌격하여 향하는 곳마다 부수고 쓰러뜨렸다. 태조께서는 그가 견고한 갑옷과 투구[銅面]를 쓰고 있어 화살을 맞출 틈이 없음을 보시고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투구를 쏘아 투구의 꼭지가 떨어지면 네가 곧바로 화살을 쏘도록 하라.”고 하시고 말에 뛰어 올라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명중시키니 꼭지가 떨어졌다. 이두란이 곧바로 화살을 쏘아 그를 죽이니 적의 기세가 꺾였다. 이로써 더욱 분발하여 공격해 대파하시니 시체가 들에 널리고 냇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으며, 나머지 적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도망갔다. 승리하여 돌아오시니 최영(崔瑩)이 여러 백관을 거느리고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영접하였다. 최영이 태조와 함께 두 번 절을 하며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삼한(三韓)을 다시 세운 것은 이 한 번의 싸움이다.”라고 하였다. 일본(日本)이 이로부터 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고, 매번 우리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묻기를, “이 만호(李萬戶)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