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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前) 폐왕(廢王) 우(禑)
  • 무진(戊辰) [전 폐왕 우 14년]

무진(戊辰) [전 폐왕 우 14년]

【명 태조 홍무 21년 ○ 일황 후소송 6년 ○ 서력 기원 1388년】이었다.

봄 정월에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도길부(都吉敷), 이성림(李成林), 반복해(潘福海) 등을 죽이고, 이인임(李仁任)은 경산부(京山府)【지금의 성주(星州)】에 안치(安置)1)죄인을 귀양 보낸 후 귀양지의 일정한 장소에 거주를 제한하는 벌을 말한다.하였다. 이인임이 오랫동안 나라의 통치권을 훔쳐 휘두를 때 임견미를 심복으로 삼고, 또 염흥방 등 네 사람을 등용하여 주요 직에 배치하였다. 관직과 직위를 돈을 받고 팔았으며, 사람들의 토지와 노비를 강제로 빼앗으니, 안팎이 분하여 이를 갈았다. 때마침 염흥방이 밀직사(密直使) 조반(趙胖)의 밭을 빼앗으니, 조반이 분노하여 그의 노비를 잡아 죽였다. 염흥방이 크게 화를 내며 조반이 “모반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국문하였다. 최영(崔瑩)이 곧 우(禑)에게 권하여 조반을 풀어 주고 임견미, 염흥방 등을 죽였다. 이인임은 공이 있다고 하여 목숨만은 살려 주고 안치하였다.

○ 최영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고 우리 태조(太祖)는 수시중(守侍中)에, 이색(李穡)은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하였다. 이때 최영이 임견미와 염흥방이 등용한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하자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임견미와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사대부가 모두 그들이 천거한 자들이니 지금은 다만 재능이 있는지, 현명한지 여부만 물어 보십시오. 어찌 지난 일을 책망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최영이 듣지 않았다.

○ 2월에 명(明)나라 황제가 철령(鐵嶺) 이북이 본래 원(元)나라에 속한 지역이니 모두 요동(遼東)에 귀속시키라 하고 철령위(鐵嶺衛)2)원문에는 철전위(鐵巓衛)로 되어 있으나, 철령위(鐵嶺衛)로 바로잡는다.를 요동에 세웠다.

○ 3월에 시중 최영의 딸을 영비(寧妃)로 봉하고, 판사(判事) 신아(申雅)의 딸을 정비(正妃)로 봉하였다. 처음에 왕이 최영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일 때에 최영이 거절하며 말하기를, “신의 딸은 비루(鄙陋)하여 지존을 받들 배필이 되지 못합니다. 주상께서 반드시 맞아들이고자 하신다면 노신(老臣)은 마땅히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으나 우가 듣지 않았다.

○ 여름 4월에 우가 평양(平壤)에 행차하여 요동을 공격하였다. 처음에 우가 명나라가 철령 이북을 강제로 빼앗은 것에 분노하여 최영과 함께 비밀히 의논하여 명나라를 공격하고 원나라와 계속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이에 서해도(西海道)【지금의 황해도】에 가서 여러 도의 군사들을 징집하고 우리 태조를 불러서 말하기를, “과인이 요양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지금 군사를 출병시킬 수 없는 네 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고, 둘째는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며, 셋째는 온 나라가 원정을 떠나게 되면 왜구가 우리의 빈틈을 노릴 것이며, 넷째는 지금 더위와 장마를 맞아서 화살촉의 아교가 풀어지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가 듣지 않고 말하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태조께서 물러나서 눈물을 흘리시며 말하시기를, “백성의 재앙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우가 평양에 이르러 징병을 독촉하고 압록강(鴨綠江)에 부교(浮橋)를 만들었다. 최영에게 추가로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를 제수하고 조민수(曺敏修)3)원문에는 조민수(曹敏修)로 되어 있으나, 조민수(曺敏修)로 바로잡는다.를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에, 태조를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에 임명하였다. 각기 장수들을 이끌고 진격하니 좌⋅우군이 합쳐 3만 8천 6백 명이었으나, 10만이라 하였다. 우가 최영과 함께 평양에 머물며 주둔하고 멀리서 지시를 내리면서 다시 나라 사람들에게 호복(胡服)을 입게 하고, 원나라의 옛 제도를 따랐다. 당시 명나라가 남옥(藍玉)을 보내 북원을 공격해 멸망시켰으나 조정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5월에 좌⋅우군이 위화도(威化島)【지금의 의주(義州)와 압록강 서쪽에 있다】에 주둔하고 원수(元帥) 홍인계(洪仁桂)가 먼저 요동 경계로 들어가 죽이고 약탈하여 돌아오니, 우가 기뻐하며 금과 비단을 내렸다.

○ 6월에 우리 태조께서 여러 군사와 도성으로 돌아와 최영을 잡아서 유배 보내셨다. 이때 태조께서 조민수와 함께 우에게 글을 올려 요동 공격이 쉽지 않은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였으나, 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최영에게도 서신을 보내 이해득실을 적극 설명했으나, 최영 또한 듣지 않았다. 태조께서 결국 여러 장수를 설득하여 말하시기를, “지금 만일 요동을 공격하면 백성에게 화가 미치게 될 것이다. 왕이 살피지 않고 최영 또한 늙고 약해져서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지 않으니 지금 공들과 같이 왕을 찾아 뵙고 화복(禍福)을 직접 설명하고, 왕 주변의 악을 없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하셨다. 여러 장수가 일제히 “감히 공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려서 압록강을 건너실 때 태조께서 백마를 타고 빨간 활에 흰 깃털 화살을 잡고는 언덕 위에 서서 군사들이 모두 강을 건널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군사들이 우러러 보며 서로 말하기를, “예부터 저와 같은 사람이 어찌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목자(木子)가 나라를 얻는다.’는 동요가 있었는데, 병사들과 민간의 노소가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 조운사(漕運使) 최유경(崔有慶)이 태조께서 군사를 돌렸다는 것을 우에게 급히 알리니, 우가 최영과 함께 도성으로 달려 돌아와서 맞서 싸우고자 하였다. 좌⋅우군이 곧 도성으로 들어오다 조민수가 최영의 군대에게 패하였으나, 이윽고 태조께서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화원(花園)으로 들어가 포위하셨다. 화원은 우가 있는 곳으로, 여러 군사가 큰소리로 외치며 최영을 보내라고 청하니 우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다가 이별하였다. 최영이 나오자 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은 사변(事變)은 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국가의 흥망과 관련되므로 부득이 이에 이른 것이니,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라고 하시고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시다가 드디어 최영을 고봉현(高峯縣)【지금의 고양(高陽)】으로 유배 보냈다. 이때 명나라가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다가 군사를 돌렸다는 소식을 듣고 이내 중지하였다.

○ 우를 폐위하고 우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세웠다. 처음에 우리 태조께서 군사를 돌리실 때에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 윤소종(尹紹宗)이 군사들 앞에 나아가서 『곽광전(霍光傳)』을 바치자, 태조께서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읽게 하셨다. 조인옥이 이로 인해 상세히 극진하게 말하기를, “지금 왕은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므로, 마땅히 왕씨를 다시 왕위에 세우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께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시니4)원문에는 심연지(心然之)로 되어 있으나, 필연지(必然之)로 바로잡는다., 이에 여러 장수가 우에게 강화(江華)로 가도록 청하였다. 우가 영비(寧妃), 연쌍비(燕雙飛)와 함께 대궐에서 나와 강화로 갔다. 이윽고 조민수5)원문에는 조민수(曹敏修)로 되어 있으나, 조민수(曺敏修)로 바로잡는다.가 힘껏 의논하여 창을 왕으로 세우고자 할 때, 이색이 이름 있는 유학자였으므로 그의 말을 빌리고자 하여 그에게 가서 물었다. 이색이 말하기를,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조민수 등이 드디어 정비(定妃)【공민왕(恭愍王) 비 안씨(安氏)】의 교지로 창을 왕으로 세우니, 그때 나이가 9세였다.

○ 명나라가 철령위를 폐지하였다.

○ 8월에 이색을 문하시중에 임명하고 우리 태조를 수시중에 임명하였다. 이때 창이 서연(書筵)6)국왕의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것을 말한다.을 열고 이색에게 명하여 서연과 관련한 일을 관장하도록 하고,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을 시독(侍讀)에 임명하여 번갈아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이 건의하여 “전시과(田柴科)가 없어져 사전(私田)이 되면서 겸병(兼幷)하는 폐해가 심하니 청컨대 혁파하소서.” 하니 우리 태조께서 아뢰어 시행케 하셨다.

○ 양광도(楊廣道) 등의 도지휘사(都指揮使) 정지(鄭地)가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왜구가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에 들어와 노략질하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살상하고 불태우니, 정지가 여러 장수를 이끌고 남원(南原)에서 싸워 크게 물리쳤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전투가 아니었으면 삼도의 백성들이 모두 없어졌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우리 태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군대의 일을 총 지휘하도록 하였다.

○ 9월에 폐왕 우를 여흥(驪興)으로 옮겼다.

○ 겨울 11월에 김문현(金文鉉)을 처형하였다. 폐왕 우 시절에 언관이 김문현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죄를 바로잡고자 했으나, 우가 듣지 않고 장형을 가하고 전의(全義)로 유배 보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목 졸라 죽였다.

○ 12월에 전 시중 최영을 죽였다. 최영이 이미 유배되었는데 다시 국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전법사 판서(典法司判書) 조인옥(趙仁沃) 등이 최영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는데, 창이 드디어 최영의 목을 베었다. 최영은 최유청(崔惟淸)의 5세손으로. 사람됨이 고지식하고 학문적 소양이 적으나 충직하고 청렴 강직하며, 힘이 남보다 강했다. 전투에 나아가서 적과 싸울 때에는 정신과 기운이 태연하고 여유가 있어서 화살과 돌이 날아들어도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싸우던 병사가 한 발자국 물러서면 곧 목을 베어 보이므로 크고 작은 1백여 차례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재산을 늘리는 데 힘쓰지 않아서 거주하는 집이 매우 누추하였으나 태연히 살았으며, 비록 장수와 재상을 겸임하여 권력을 오래 잡았으나 뇌물을 주고 청탁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가 73세였다. 처형에 임하여 말과 얼굴빛이 변하지 않고 머리가 이미 잘렸는데도 옮겨질 때까지 몸이 나무처럼 서 있었다. 그가 처형된 날 도성 사람들이 시장을 파하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후에 시호를 ‘무민(武愍)’이라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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