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는 효도와 우애에 상을 내리고 늙은이를 위문하며,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자를 위로하며 어루만졌다. 경덕왕(景德王)은 향덕(向德)이 굶주린 부모에게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였으므로 조(租) 3백 곡(斛)과 집 한 채를 상으로 내려주고, 이와 함께 비석을 세워 이 일을 기록하였다. 문무왕(文武王) 때에는 사찬(沙飡) 여동(如冬)이 벼락 맞아 죽은 것을 보고 사람들이 “어머니를 구타한 죄이다.”라 하니, 그 일이 정리(正理)는 아니지만 정부에서 풍속 교화에 마음을 썼음을 알 수 있다.
희강왕(僖康王)과 신무왕(神武王)은 숙질이 다투었으나, 고구려(高句麗)에서는 군신 간에 임금을 죽인 자가 적잖고 절개를 지켜 죽은 자도 많았다. 삼국 중에 신라가 이런 일이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