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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錢貨)와 은병(銀甁)을 주조하다

그 외 교역은 토산물을 사용하였다. 숙종(肅宗)은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전화【해동통보(海東通寶)】와 은병【은 1근으로 만들었고 우리나라 지형을 본떴다. 세속에서 이르기를 활구(闊口)라 하였다.】을 주조하고 각 처에 점포를 열어 전화를 사용하는 이익을 알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쇄은(碎銀)을 사용하고 또 원(元)나라로부터 온 지원보초(至元寶鈔)와 중통보초(中統寶鈔)를 보급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은 새로운 소은병을 사용하여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게 하고 옛 은병을 금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는 은병도 날로 변하여 구리가 되었고, 마루(麻縷, 삼과 삼실)도 날로 거칠어져 포(布)가 되지 못하였다. 그 후에 동전【삼한중보(三韓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동국통보(東國通寶), 해동중보(東國重寶) 등 여러 종류이다.】이 또 쓰이더니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동전, 은병이 함께 없어지고 오직 오종포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포가 더욱 거칠어 매우 불편하였는데, 논의하는 사람들이 “추포(麁布)를 금하고 저폐(楮幣)를 만들어 오종포와 함께 사용하라.”고 하였으나 결국 행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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