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관기가 자못 많았는데, 상류 사회 사람들이 때때로 이들을 총애하였다. 우왕(禑王) 때에는 관기로 옹주(翁主)가 된 자도 있었다. 또 충혜왕(忠惠王)은 부친의 첩을 욕보이고 신하의 처와도 간통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은 가까운 신하들을 시켜 여러 비를 욕보이게 하였다. 우왕은 다른 사람의 처첩을 간음하여 음란함과 그 비례(非禮)가 말로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중엽 이래로 외적의 침략을 당하여 부녀가 죽임을 당할지라도 욕을 당하지 않는 자가 많았으니 그 수절의 곧고 바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