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송(李如松)이 평양(平壤)에 들어서면서부터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개성(開城)에 이르러 남병(南兵)1)유목 민족에 대응하기 위해 주로 기병으로 이루어진 북병에 대해 복건성, 절강성 등 남방 지역에 배치되어 왜적에 대응했던 포병과 화기수들로 구성된 군대를 말한다.을 머물게 하고 친히 벽제관【파주(坡州) 남쪽】에 나아가 적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과 싸우다가 대패하였다. 이에 이여송이 퇴군하고자 하였으나 유성룡(柳成龍), 유홍(兪泓) 등이 논쟁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이 마침내 두려워하여 개성으로 되돌아가고, 다시 북쪽으로 퇴군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떠도는 말이 있었는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함경도에서 양덕(陽德), 맹산(孟山)을 넘어 평양을 공격해 올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여송이 이에 왕필적(王必迪)을 개성에 체류시켜 지키게 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후에 권율(權慄)의 행주 대첩(幸州大捷)을 전해 듣고 회군한 것을 후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