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平壤)이 무너지니 성안의 관리와 백성이 모두 도망하였다. 아민(阿敏)이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중화(中和)에 주둔하고 7개 조를 서술하여 조선(朝鮮)이 만주(滿洲)를 해한다고 질책하였다. 이때에 한양[京城]은 백성이 무너져 흩어졌고, 김상용(金尙容)은 어고(御庫)와 다른 여러 창고에 불을 지르고 강화(江華)로 도망하였다. 아민은 한양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여러 패륵(貝勒)이 따르지 않자 평산(平山)에 주둔하고 부장(副將) 유흥조(劉興祚)를 강화(江華)에 보내 화친을 제안하였다. 왕이 어쩔 수 없이 종친 원창령(原昌令) 이의신(李義信)을 왕의 동생이라 하고 유흥조와 함께 평산에 이르러 특산물을 뇌물로 주고 화친을 구하게 하였다. 패륵 병탁(岳託)이 아민에게 일러 말하기를, “조선 왕과 맹세한 후에 군사를 돌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원창령은 억류하고 유흥조만 다시 강화에 보냈다. 이에 왕이 단을 쌓고 백마와 흑우(黑牛)를 바쳐 하늘께 제사하시며 만주의 형제국이라 맹세하였다. 만주군이 돌아갈 때 아민은 자기가 맹세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하여 방종하게 약탈하면서 돌아갔다. 아민은 평양에 이르러 또 원창령과 동맹하고, 군사의 일부를 의주(義州)와 진강(鎭江)【만주 구련성(九連城)】에 머물게 하고 그 나머지는 돌아갔다. 이에 조선은 원창령에게 아민을 따라 만주에 가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