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景宗)이 즉위하시니 조중우(趙重遇) 등이 상소하여 희빈(禧嬪)의 명호(名號)를 바르게 하자고 하였다. 윤지술(尹志述)이 이이명(李頤命)이 지어 바친 숙종(肅宗)의 묘지문에 빠트린 것이 있다 하여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였다. 이때에 왕이 병이 있어 왕자가 탄생하기를 바라시더니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의 상소에 따라 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좌의정(左議政)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태채(趙泰采) 등과 의논하여 왕의 아우 연잉군【영조(英祖)】을 동궁으로 책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