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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갑오(甲午)년 이후 10년 기사

청일 전쟁[日淸戰爭]은 전적으로 한국(韓國)의 독립을 확고히 하고자 한 연유에서 발발한 것이라 한국이 또 일본(日本)의 뜻에 감동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일본의 간섭이 과도하고 권고가 각박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정무에 간섭하고 그 외 제도와 법률 등을 한꺼번에 시행하니 한국인이 언짢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배일당(排日黨)이 러시아 공사[露使] 베베르[韋貝]와 서로 통하더니 곧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와서 또 을미(乙未) 8월의 사변(事變)이 있었다. 이로부터 한국 조정의 원한이 더욱 심해지고 일본은 일대 오욕을 스스로 취하였다.

이에 배일당의 우두머리 이범진(李範晋)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모의하니 왕이 러시아 공사관[露館]으로 옮기시고 주륙(誅戮)을 대대적으로 행하였다. 그 후 모든 권력이 모두 베베르에게 돌아가고 일본은 러시아의 압제를 받았다.

그 후 러시아의 새로운 황제 니콜라이[尼古喇] 2세【즉 지금의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일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를 러시아 수도에 보냈다. 이에 러⋅일 협상이 이루어지니 이는 일본이 전쟁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이로부터 러시아 공사가 먼저 일본 군제(軍制)를 폐하고 재정 고문(財政顧問)이던 영국인[英人] 브라운[柏卓安]을 해고하고 재정 경제 기관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얼마 후 러시아를 증오하는 미국파(米國派)가 출현하였다. 또 독립 협회(獨立協會)가 생겨 자주 독립과 애국, 충군으로 입장을 정하고 법령, 군대, 재정을 자국이 관리한다 하여 안팎의 공감을 일으켰다. 이에 러시아가 다시 한국 조정을 협박하지 못하였고 마지윤(馬之允)이 대신 와서 오로지 후퇴를 위주로 하고 별도로 청나라에 대한 방략을 강구하였다.

지난날 청일 전쟁 때 러시아가 요동 반도(遼東半島) 반환에 참여한 후 여순(旅順), 대련만(大連灣)을 조차하고 동청 철도(東淸鐵道)를 부설하였다. 또 북청 사변(北淸事變)【청나라 단비(團匪) 사건】1)1900년 중국 산동성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폭동을 계기로 화북 일대에 퍼진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말한다.을 틈타 만주(滿洲)의 여러 요지에 출병, 점거하였다. 또 러시아는 독자적으로 청나라와 교섭하여 만주의 철도, 광산, 토지에 대한 독점권을 얻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 영국, 미국 3국과 이탈리아[伊太利], 오스트리아[奧國], 독일(獨逸)이 모두 청나라에 그 조약을 파기하라고 하였다. 일본이 또 전투를 준비하니 러시아가 두려워하여 급히 조약을 철회하였다.

그 후 임인년(壬寅年, 1902)에 일본, 영국 양국이 동맹을 맺어 시국이 크게 달라졌다. 그 조약은 곧 청나라, 한국 양국의 독립을 인정하여 전혀 침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러시아가 만주에서 자유롭게 망동(妄動)하지 못하게 함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프랑스[佛國]와 동맹하였고 청나라에게는 만주의 러시아군은 18개월 사이에 철군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 군사를 북한과의 경계로 옮기고 여순(旅順) 요새를 축조하고 만주와 한국의 경계를 더욱 위협하였다. 또 급히 알렉세예프[亞歷詩厚]를 러시아령 동아시아 태수[露領東亞細亞太守]로 임명하고 극동의 러시아 행정, 외교, 태평양 함대, 그 외 군대 총지휘권을 부여하고 만주와 한국의 경계에 더욱 병력을 증원하였다. 계묘년(癸卯年, 1903) 9월 이후에 감히 한국 주권을 침해하여 용암포(龍巖浦) 문제가 일어났으며 압록강(鴨綠江)상에서 경보가 빈번히 전해졌다. 이에 일본과 미국 두 나라가 한국 조정에 압록강 개방을 요구하였다. 만주 문제가 점차 커지자 일본 공사(日本公使) 구리노 신이치로[栗野愼一郞]는 러시아 조정에 “청나라, 한국 양국의 독립과 영토를 보전하고, 청나라, 한국 양국의 상공업을 각기 균등하게 하고,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우월한 이익을 취하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에서 철도 경영에서의 특수한 이익을 갖는 것을 승인하고, 한국의 개혁에 대한 조언과 조력은 일본이 전적인 권한을 갖는다.”라고 제의하였다. 러시아 조정은 “만주 연안은 일본과 전혀 무관하고 한국도 일본이 군사 전략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라고 항의하였다.

이때 일본이 한편으로는 러시아와 교섭하고 한편으로는 청나라와 만주 개방 조약을 정하였다. 러시아가 태평양 함대를 보내 여순 입구에서 시위하며 육군은 남만주에 집합하여 만주와 한국 경계에서 전비를 가다듬었다. 무릇 이 일을 서로 고집하여 맞서기를 여러 해이다가 광무(光武) 7년(1903)【계묘(癸卯)】 12월 12일에 이르러서야 “일본이 만주에는 관계가 없고 일본과 러시아의 협상은 오직 한국에 있다.”라고 회답하였다. 이는 그 욕심이 만주를 병탄하여 각국의 권리와 특권을 뺏고자 함이었다. 이에 일본이 12월 말부터 전비를 가다듬고 다음 해 2월 5일에 군사 동원령을 전하고, 외상(外相)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러시아 공사 로젠[魯齊人]을 거절하여 일본과 러시아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일본 함대는 2월 8일 여순 입구 밖에서 러시아 함대를 포격하고, 2월 10일에 일본 천황의 선전 포고서를 발표하였다. 무릇 양국의 위태로운 형국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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