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英祖) 4년(1728)에 이인좌(李麟佐)는 충청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정희량(鄭希亮)은 경상도에서 반란을 일으켜 안성(安城)의 산 위에 진을 쳤는데, 전(前) 영상(領相) 최규서(崔奎瑞)가 왕께 반란을 알렸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을 도순무사(都巡撫使)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다. 왕이 친필[御筆]로 ‘일사부정(一絲扶鼎)’1)한 가닥 절의(節義)로 나라를 바로 서게 한다는 뜻이다. 4글자를 써서 최규서에게 하사하셨다. 영조 5년(1729)에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采)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영조 16년(1740)에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11월에 세자가 죽으니 시호(諡號)를 효장(孝章)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