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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

제목 국자감
한자명 國子監
유형 제도
시대 고려 시대
관련국가 고려
유의어
별칭•이칭
정의
고려 시기 개경(開京)에 설치된 최고의 국립 교육 기관.
내용

고려 초부터 신라의 국학(國學)을 계승한 교육 기관을 운영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992년(성종 11)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체제를 갖추어 개편한 뒤 국자감(國子監)이라 하였다. 국자감은 여러 차례 명칭이 변경되었다. 1275년(충렬왕 1)에 원(元)나라의 간섭을 받아 국학으로 개칭하였다가, 1298년(충선왕 1) 충선왕(忠宣王, 재위 1298, 1308∼1313)이 성균감(成均監)이라 고쳤고, 1308년에는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면서 성균관(成均館)이라 하였다. 그 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실시하면서 명칭을 원래대로 국자감이라 고쳤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성균관으로 다시 바꾸었다.

국자감은 크게 유학 학부와 기술 학부로 나뉘었다. 유학 학부는 다시 세 분야로 나뉘었는데, 국자학(國子學)은 대개 문무관 3품 이상, 대학(大學)은 5품 이상, 사문학(四門學)은 7품 이상의 자제가 입학하였다. 기술 학부는 율학(律學)⋅산학(算學)⋅서학(書學)으로 나뉘고, 8품 이하의 자제와 서인(庶人)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충선왕 대 이후 유학 학부가 강화되고 기술 학부가 분리되는 경향으로 가게 되었다.

국자감의 학생들은 과거에 응시할 때 예비 시험을 면제받고 바로 감시(監試)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학업이 우수한 자는 감시나 과거의 일부도 면제받았다.

국자감에는 설치 당시부터 토지가 지급되었으나, 이후 재정난을 겪게 되자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재정을 정상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몽골과의 전쟁과 토지 제도의 문란으로 다시 운영이 마비 상태에 빠지자, 안향(安珦)의 건의로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재정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의의

고려 시기 국가에서 설립한 최고 교육 기관으로, 학생들은 과거에 응시할 때 여러 가지 특전을 받았으므로 관료를 양성하는 기관 역할을 하였다. 유학과 함께 기술 교육까지 담당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유학 교육만 담당하는 기관으로 변모하였다.

▶ 관련자료
국자감(國子監) 국학(國學) 대학(大學) 성균감(成均監) 태학(太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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