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 기획 | 자료해설 | 시나리오 | 특수편집 | 구축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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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 | 류주희 | 이정란 | 양윤경 | 리더스 미디어 센터 | 2013 |
난중일기 | 정성희 | 안지은 | |||
서유견문 | 김윤희 | ||||
경국대전 | 윤덕영 김성희 이규리 구영옥 |
김윤주 | 유영수 | (주)블루디씨 | 2014 |
북학의 | 김창수 | ||||
한국통사 | 김윤희 | ||||
왕오천축국전 | 윤덕영 이규리 구영옥 |
임혜경 | 송미숙 | (주)블루디씨 | 2015 |
삼강행실도 | 이광렬 | ||||
택리지 | 김현정 | 유영수 | |||
매천야록 | 서동일 | 송미숙 | |||
조선상고사 | 박준형 |
1428(세종 10), 진주 사람 김화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 발생
패륜 소식을 접하고 놀란 세종
아들이 아비를 죽인 일이 일어난 것은
과인의 덕이 부족한 때문이오.
어찌하면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겠소?
형벌을 더 무겁게 해야합니다.
책을 만들어서 백성에게 효행을 가르치소서.
책을 편찬하되
우리나라 사람의 효행도
모두 수집해서 만들라.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충신
어버이와 자식(父爲子綱) 효자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열녀의 이야기를 모은 책
삼강은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이요,
일만가지 교화의 근본이며 원천이다.
글을 모르는 백성에게도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장면을 한 장에 배치한
그림을 넣어 책을 편찬
효자편
누백이 호랑이를 잡다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살해당하자 최누백은 복수를 결심
최누백이 호랑이를 꾸짖고 죽이다.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무덤곁에서
3년 동안 움막을 짓고 살다.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누백의 효를 칭찬하다.
충신편
박제상의 충렬
신라왕이 박제상에게 일본(倭國)에 볼모로 간 동생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다.
박제상이 일왕(倭王)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다.
신라왕의 동생은 탈출시켰으나,박제상은 탈출에 실패하고 잡히다.
박제상은 일왕의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맞다.
열녀편
최씨가 왜구를 꾸짖다
왜적이 마을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다.
왜적이 최씨를 잡고 칼을 내보이며 위협하다.
최씨가 "죽어서 의를 지키겠노라"며 저항하자 왜적이 그녀를 해치다.
조선 시대 내내 삼강행실도는
지속적으로 새롭게 간행되었다.
1471년(성종 12)에
한글을 추가한 언해본 간행
1514년(중종 9)에 간행된
속삼강행실도
1518년(중종 13)에 경상도지방에서
간행된 이륜행실도
임진왜란 이후 1617년(광해군 9)에
조선의 인물을 중심으로 간행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797년(정조 21)에 간행된
오륜행실도
국가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삼강의 유교 이념 전파
삼강행실도의 교육과 포상에 대해 법전에 규정
삼강행실도를
부녀자와 어린아이에게 가르쳐 깨우치게 하고
충효의 행실에 대해서 포상을 한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이후 삼강의 도덕은
판소리, 소설 등을 통해서
백성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게 된다.
조선 시대
백성의 도덕 교과서
삼강행실도
1. 세종대 『三綱行實圖』의 편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유교 도덕의 기본으로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 세 가지라는 뜻의 삼강(三綱)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行實]를 그림[圖]과 함께 수록한 책이다. 1434년(세종 16) 반포된 이 책은 집현전의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편찬하였고, 조선시대 최초로 편찬된 행실도(行實圖)였다. 『삼강행실도』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찬(官撰) 교화서로서 이후 간행된 여러 행실도들의 모범이 되었다.
『삼강행실도』는 고려 말에 간행된 『효행록(孝行錄)』의 영향이 컸다. 1428년(세종 10) 9월 진주사람 김화(金禾)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물론 김화에게는 능지처참((凌遲處斬)으로 사형(死刑)의 벌을 내렸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10월 3일 경연에서 변계량(卞季良)은 『효행록』의 반포를 건의하였고, 이에 세종은 직제학 설순에게,
구찬(舊撰) 24효(孝)에다가 또 20여 인의 효행을 더 넣고, 고려와 삼국시대의 사람으로 효행이 특이한 자도 또한 모두 수집하여 한 책을 편찬해 이루도록 하되, 집현전에서 이를 주관하라.
고 하여 『효행록』을 다시 찍도록 한 것이 아니라 개찬(改撰)하도록 하였다.
『효행록』은 1346년(충목왕 2) 권보(權溥)와 그의 아들 권준(權準), 사위인 이제현(李齊賢)이 편찬·간행한 것으로 권준이 화공에게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를 그리게 하고, 이제현에게는 그 그림에 인물이나 사물을 기리어 칭찬하는 글인 찬(讚)을 붙이게 하여 권보에게 올리자, 권보가 38명의 효행사례를 덧붙이고 역시 이제현이 찬을 짓게 하여 만든 것이다.
세종이 언급한 『구찬이십사효(舊撰二十四孝)』는 『효행록』 내용 중에서, 처음에 권준의 주도로 만들어진 24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효행록』 이전의 『이십사효도』는 24명의 인물 그림과 그것을 기리는 글이 주요한 구성요소였다. 『효행록』의 개편을 논의하면서도 세종은 그 전부가 아닌 『구찬이십사효』만을 언급한 것도 그 내용만큼이나 그림과 찬이라는 구성요소도 중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삼강행실도』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처음에는 『효행록』을 개편하는 일로 시작하였으나 3년 정도가 지난 1431년(세종 13) 11월이 되면 『삼강행실도』 편찬으로 방향이 바뀌게 된다. 효자들의 사례를 수록한 책에서 충신과 열녀 이야기까지 포괄하는 쪽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로부터 1년여가 지난 1432년(세종 14) 6월 책의 편찬이 완료된다. 이에 세종은 책의 이름을 『삼강행실도』로 하사하고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인쇄케 하였으며 집현전 응교(應敎) 권채(權採)에게 서문과 전문(箋文)을 쓰도록 하여 1432년(세종 14) 6월 9일 그 결실을 보게 된다.
그리고 1433년(세종 15) 2월 24일에는 인쇄를 마치고 예문대제학(禮文大提學) 정초(鄭招)에게 명하여 발문(跋文)을 짓게 하였다. 1434년(세종 16) 4월 27일 일반에 반포할 것을 명하여 중추원(中樞院) 사(使) 윤휴(尹淮)에게 짓게 한 교서를 발표한다. 그 후 11월 24일 종친과 신하에게 하사하고 여러 도(道)에 반사하게 되니 『삼강행실도』의 제작이 첫발을 내딛은 지 6년 만에 마무리된 것이다.
『삼강행실도』 편찬에 참여한 이들과 이를 지시한 세종이 일관되게 강조한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그 첫 번째는 삼강의 강조였다. 『삼강행실도』 서문에서는 "천하의 떳떳한 도가 다섯 가지 있는데, 삼강이 그 수위에 있으니 실로 삼강은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이요, 일만 가지 교화의 근본이며 원천이다"라고 하였고, 『삼강행실도』 전문에서도 "인륜의 도는 본래 삼강에서 벗어남이 없고 천성(天性)의 참됨은 진실로 만세에 같으니, 마땅히 옛사람의 행실을 모아서 오늘의 법으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하여 『행실도』 제작을 통하여 삼강을 대민교화의 기본윤리로 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대민교화를 일관되게 강조하였다. 『삼강행실도』 간행의 시발이 된 1428년 경연 논의에서 '『효행록』을 간행하여 이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쳐 주려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록 폐단을 구제하는 급무는 아니지만 실로 교화하는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교화서 간행을 대민교화의 근본적인 대책으로 생각하였다.
책의 체제 면에서 『삼강행실도』가 그림을 가장 중요하게 배치한 것도 대민교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그림은 문자해독 능력이 부족한 백성들이라도 책에 담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였다. 사실 『삼강행실도』가 간행된 것은 한글창제(1443년) 이전으로 모든 내용은 한자로 기록되었다. 일반적으로 『삼강행실도』는 한글문헌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최초의 『삼강행실도』는 굳이 분류하자면 한문본으로, 효자나 열녀, 충신들의 이야기는 한문으로만 쓰여 있었다. 이 때문에 일반백성들이 쉽게 읽기에는 너무나 어려웠고 교화목적을 달성하기에는 한계가 많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삽화로 들어간 행실도의 그림들이 한 장에 한 사람을 수록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앞면에는 삽화를 뒷면에는 글을 배치하는 전도후설(前圖後說)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삼강행실도』의 삽화는 글 없이 한 면 전체를 그림으로만 가득 채우는 방식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삽화가 포함된 중국도서의 경우, 상단에는 그림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글을 배치하는 상도하문(上圖下文)의 형식를 취하고 있다.
이는 그림과 글을 같이 읽고 보는 것이 가능한 편집형태로, 삽화의 내용은 글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행실도의 앞면에는 그림을 배치하고 뒷면에는 글을 나누어서 배치하는 전도후설의 방식은 책의 내용과 글을 함께 보고자 하는 경우에는 상당히 불편한 방식이다. 장을 넘겨야만 앞면 삽화와 관련된 글을 볼 수 있고 글과 그림을 절대로 한번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익숙하지 않은 편집방식을 채택한 것은 글과 그림을 한번에 볼 필요가 없다고 가정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초 『삼강행실도』는 교화서로서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한문으로 쓰여질 수밖에 없는 모순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글(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내용을 파악하기 쉽게 만들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고, 그림이 그 역할을 전적으로 담당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통상 글이 주가 되고, 그림이 삽화로서 부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데 반하여 『삼강행실도』는 그림을 주로 삼아 전면에 배치하고, 글은 부차적인 것으로 뒷면에 배치하는 편집형식을 따른 것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행실도의 대민의식의 정수는 그림에 담겨있다고 보아야 하며, 『효행록』에 대해서 처음부터 그림과 연관된 권준의 24장을 위주로 논의한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그리고 그림을 모아놓은 화첩이 아니면서도 서명이 『삼강행실(三綱行實)』이나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이 아닌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인 점도 설명이 가능해 진다.
하지만, 『삼강행실도』 그림에는 또다른 배려가 숨어있다. 『삼강행실도』 삽화는 한 화면에 단 하나의 에피소드만을 그리는 '단일방식'과 구별되는 '복합방식'으로 본문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수록내용 중 하나인 고려말의 최누백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누백포호(婁伯捕虎, 최누백이 호랑이를 잡다)'라는 제목과 그림속에 누백이라고 네모칸안에 써 넣은 곳 세 군데를 제외하면 글은 보이지 않고, 한 면 가득 그림으로만 채우고 있다. 그런데 신문 4컷 만화처럼 칸칸이 구분되어있지 않다뿐이지 최누백을 그린 삽화는 모두 네 장의 그림을 한장 속에 함께 그리고 있다.
한림 학사(翰林學士) 최누백은 수원 호장(水原戶長) 최상저의 아들이다.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하자, 누백이 그 호랑이를 잡으려 하니, 어머니가 말렸으나, 누백이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겠습니까?"하고, 곧 도끼를 메고 호랑이의 자취를 따라갔다. [A] 호랑이가 이미 다 먹고 배가 불러 누워 있으므로, 누백이 곧장 앞으로 나가 호랑이를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우리 아버지를 먹었으니, 내가 너를 먹어야 하겠다."하니,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려 있었다. 드디어 찍어 죽이고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찾아내어 그릇에 받들어 담고, 호랑이 고기는 독에 넣어 냇물 속에 묻었다. [B] 아버지를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장사지내고, 여묘살이 하였는데, [C] 어느 날 졸고 있을 때에 그 아버지가 와서 시(詩)를 읊었다. 수풀을 헤쳐, 효자 여막을 찾아오니,[披榛到孝子廬]......(중략). 읊기를 다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복(服)을 마치고 나서 호랑이의 고기를 꺼내다가 다 먹었다.[D]
그림의 가장 아래 부분이 바로 [A]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호랑이를 잡으러 떠나는 최누백을 만류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남편을 잃은 누백의 어머니는 상복을 입고 있고, 호랑이를 잡기 위해 어린 누백은 도끼를 준비한 모습이다. 바로 위의 그림은 [B]에 해당하는 것으로 배불러 누워있는 호랑이를 도끼로 내리치려는 누백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두번째 그림 왼쪽 위가 [C]에 해당되는 장면으로 호랑이를 잡아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묘를 만들고 그 옆에서 여묘살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화면의 오른쪽 윗부분이 [D]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누백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난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꿈이라는 것을 그리기 위해 누백의 아버지가 마치 하늘로부터 구름같은 것을 타고 내려온 것처럼 그리고 있다.
이처럼 글을 모르는 사람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그림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화면에 '복합방식'을 채택하여 이야기의 전개가 효과적으로 한 화면에 재현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한 장의 그림이지만 모두 네 개의 다른 장면으로 분할하여 그려놓았기 때문에 그림을 보는 사람은 장면을 순서대로 따라가는 것으로 보다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행실도』는 글을 모르는 '일반백성'을 대상으로 행실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기 위하여 그림이라는 방식을 채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표현방식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민교화의 목적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삼강행실도』를 통한 교육도 강조하였다. 반포 교지(敎旨)를 통해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 책을 비록 나누어 주었을지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역시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리오……서울의 한성부(漢城府) 5부와 외방의 감사, 수령은 널리 학식이 있는 자를 구하여 두터이 장려를 더하도록 하되, 귀천을 말할 것 없이 항상 가르치고 익히게 하여, 부녀까지도 친속으로 하여금 정성껏 가르쳐 분명히 깨달아 모두 다 알도록 하라
고 하여 학식자와 친속을 통한 교육과 교육대상을 귀천과 성별에 따라 구분하지 말 것을 명시함으로써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상적이면서도 자체적인 교육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단순히 책의 편찬과 반포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교육방식과 교육대상에 대한 것도 함께 명시함으로써 교화목적의 실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데 까지도 생각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세종대에 편찬된 『삼강행실도』는 삼강이란 기본윤리를 일반 백성에게 보급하기 위하여 간행되었으며 교화목적에 부합하는 체제를 갖추었고 이를 통한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실질적인 활용을 추구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2. 조선 전기 『삼강행실도』의 보완과 정리
『삼강행실도』는 이후 변화와 보완의 과정을 거쳐 보다 목적에 부합하는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우선 『삼강행실도』가 널리 보급되기에는 수록인물의 수가 많았다.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110인씩 선정하여 수록인물이 총 330인이었던 까닭에 이를 한 책으로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3책으로 묶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분량으로 일반 백성들이 두루 보기에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간행비용이 상당히 소용되고 민간에까지 효율적으로 나눠주기가 용이하지 않았던 것 같다. 1452년(단종 즉위년) 11월 『삼강행실도』의 반포를 언급하면서 「효자도」를 우선 간행하도록 한 것과 1481년(성종 12) 3월에 『삼강행실열녀도』만을 인쇄반사(印刷頒賜)하였던 것은 이러한 정황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후 『삼강행실도』의 분량을 줄이자는 의견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1489년(성종 20) 6월 1일 경기관찰사 박숭질(朴崇質)이 『삼강행실』을 간추려 인쇄하자고 건의하였고, 성종은 이것을 재가하였다. 『삼강행실도』를 간추려 내는 과정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어 17일 후인 같은 달 18일에 책임을 맡은 시강원(侍講院) 보덕(輔德) 허침(許琛)과 이조정랑 정석견(鄭錫堅)이 효자, 충신, 열녀를 각각 35인씩 총 105인을 골라내었음을 알리고 이를 한 책으로 묶어 펴낼 것을 건의한다. 세종대에 간행된 『삼강행실도』는 성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한 책 분량으로 재정리되었고, 기존에 있던 간행과 반포의 불편을 해소하게 되었다.
세종대 『삼강행실도』가 최초 간행되었을 때는 한글창제 이전이었기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삽화를 중요시하였고 학식자와 가족들에 의한 교육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이 직접 읽을 수 있는 것에 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세종대에도 한글창제 직후 『삼강행실도』에 대한 언해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글창제에 대한 신료들의 반발 등의 분위기 속에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또한 성종대에 가서야 해결되어 1481년을 전후한 시기에 언해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언해는 분명 한문으로 쓰여진 행적기사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지만 원문 그대로를 직역한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행적기사와 함께 뒷면에 판각되지 않고 앞면 삽화의 윗부분 빈자리에 추가되어 새겨졌다. 이는 삽화와 언해문을 함께 볼 수 있도록 한 조치로서 기존의 한문으로 된 본문 내용이 백성들을 위한 부분이 아니었음을 한번 더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결국 성종대에 기존보다 분량은 1/3 정도로 줄이고 언해를 추가한 『삼강행실도』 산정언해본(刪定諺解本)이 완성되었고, 이것은 이후 조선시대 내내 중간과 복간된 『삼강행실도』의 근간이 되었다.
한편 『삼강행실도』에 대한 교육과 삼강에 대한 실천이 우수한 자에 대한 포상이 법제화되는 진전도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장권조(獎勸條)에
『삼강행실도』 를 한글로 번역하였으니 경외(京外)의 사족, 가장(家長), 부로(父老) 또는 그 교수와 훈도 등으로 하여금 부녀와 어린아이들을 가르쳐 깨우치게 하고 대략 그 큰 뜻을 통하도록 하라. 행실이 남다른 자가 있어 한성부와 관찰사가 계문(啓聞)하면 포상을 시행한다
라고 교육과 포상을 규정함으로써 세종대부터 추구한 기본윤리의 보급 기조가 한층 강화되었다. 이렇듯 『삼강행실도』는 세종대에 간행되었으나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서 분량축소와 언해, 법제화 등의 변화와 진전을 보이게 된다. 이런 변화과정을 통해 『삼강행실도』는 조선시대 행실도의 하나의 모범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된 것이다.
3. 중종대 『속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
중종반정이 있은 지 두 달여 만인 1506년(중종 1) 11일 2일 사온서 주부(主簿) 우행언(禹行言)이 『삼강행실』의 반포를 건의하였고, 1510년 1월에는 『삼강행실도』를 팔도에 나눠주었다. 1년여만인 1511년(중종 6) 10월에는 2,940질의 방대한 양을 다시 한번 인쇄 반포케 하였다. 이렇듯 중종은 반정에 의해서 즉위한 직후부터 세종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 재간행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반정 이후 흐트러진 국가기강을 빠르게 정착시킬 필요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종은 이와 별개로 『삼강행실도』를 보강한 새로운 책, 즉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의 편찬도 추진하였다. 1511년(중종 6) 8월 『삼강행실도』를 많이 찍어 중외에 반포할 것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건국 이후의 열녀, 효자 가운데 실려 있지 않은 자를 찬집하여 그림을 그리고 시와 찬을 지어 간행하라고 전교하였다. 중종대 『속삼강행실도』 편찬의 중요한 특징은 찬집청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1512년(중종 7) 10월 중종의 명에 의해서 찬집청이 설치되고 본격적인 찬집작업이 시작되었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1514년(중종 9) 6월 27일 찬집이 완료되었다.
『속삼강행실도』 편찬은 『삼강행실도』를 보완하는 의미가 강하였다. 편찬 초기부터 국초 이래 열녀와 효자 중에 『삼강행실도』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을 찬집하라고 하였고 반정 중에 충절로 죽은 사람도 절의를 포상하는 법에 따라서 함께 수록하라고 지시하였다. 중국 사례 가운데에서도 명나라 초기 기록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하려 하였다.
편찬체제는 성종대 확립된 『삼강행실도』 산정언해본의 체재를 그대로 이었다. 『속삼강행실효자도』, 『속삼강행실충신도』, 『속삼강행실열녀도』 3권 구성으로 『삼강행실도』의 3권 체제와 구성, 분류, 명칭이 일치하였다. 그러나 『삼강행실도』에서와 같이 수록인물을 같은 숫자로 하지는 않았고 효자 36명, 충신 5명, 열녀 26명으로 총 67인을 수록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인물 중심으로 수록되어 효자 33인, 충신 2인, 열녀 18인 총 53인이 우리나라 인물로 전체의 약 80%를 차지하였다.
편집 방식도 『삼강행실도』 산정언해본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다보니 실제 한글창제 이후에 새롭게 편찬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언해가 행적기술 부분(뒷면)에 포함되지 않고 전대의 예를 그대로 따라 앞면의 그림 위에 그대로 배치되었다.
중종대에는 『속삼강행실도』와 더불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도 간행되었다. 『삼강행실도』로 이미 간행된 충효열의 윤리 외에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에 관한 두가지 윤리(二倫)을 권장하기 위해 이륜의 행실이 뛰어나 본보기가 될만한 인물 48명을 선별하여 그 행적을 수록한 책으로 1518년(중종 13)에 금산(金山에)서 김안국(金安國) 개인의 주도로 간행되었다. 1516년 경연 자리에서 국왕에게 『이륜행실도』의 편찬을 건의한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처음부터 개인적으로 간행을 추진했던 것은 아니었다. 장유유서(長幼有序)와 붕우유신(朋友有信)의 관계에 관한 내용을 『삼강행실도』에 보충하여 『오륜행실도』로 편찬 반포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이용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미처 실행되기 전에 김안국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렇듯 당초의 『오륜행실도』로 계획하고 정부 주도로 간행하려던 것에서 『이륜행실도』라는 체제로 경상도관찰사 김안국 개인의 주도로 편찬이 진행되었다. 편찬 실무는 당시 금산에 은거 중이던 조신(曹伸)에 의해 진행되었고, 1518년 3월 금산군에서 간행되었다. 수록된 간기(刊記)를 통해 당시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을 보면, 경상도 지방관이거나 경상도 도사(都事)인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고 각수(刻手)의 경우에도 경상도 지방민만이 동원되고 있어 당시 경상도 지역의 인력과 물력만으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륜행실도』는 목판본 1책으로 간행되었는데, 권차는 없으나 내용상 형제, 종족, 붕우, 사생(師生)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인물은 모두 중국 인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형제 25명, 종족 7명, 붕우 11명, 사생 5명 총 48명이 수록되었다.
『이륜행실도』는 수록내용면에서 삼강에서 빠진 이륜(二倫)의 모범사례를 수록하여 『삼강행실도』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구성과 체재에서도 『삼강행실도』를 따르고자 하였다. 한 인물을 앞뒤 한 장으로 구성하여 앞면에는 삽화를 넣고 뒷면에는 행적기사와 그 내용을 압축한 찬시(贊詩)를 수록하고, 언해를 앞면 상단여백에 배치하는 것까지도 『삼강행실도』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이처럼 『속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는 4년의 차이를 두고 간행되었으나 모두 『삼강행실도』를 보완하고 계승하려 하였다. 편집방식과 수록인물의 선정방향 모두 『삼강행실도』의 존재를 의식한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음은 이에 대한 반증이다.
4. 임진왜란과 『동국속삼강행실도』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윤리와 기강 회복하고 국왕의 권위를 세울 방책이 필요하였다. 당시 전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신하로서 임금을 위해, 자식으로서 부모를 위해, 아내로서 절개를 변치 않기 위하여, 노비로서 의를 지키기 위하여 죽었다. 이들에 대해 포상을 실시하고 그들의 공적을 기록하자는 건의는 임진왜란 중 비변사로부터 제기되었다. 1595년 전란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선조는
사변 후로 사절(死節)하여 정표(旌表)한 사람들의 행적을 의당 먼저 인출하여 온 나라에 반포할 일을 비변사에 이르라
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예조에서 국가를 위해 사절한 사람만을 뽑을 수 없으며, 효자와 열녀의 행적도 아울러 출판해 내는 것이 타당하다고 건의하고 이를 선조가 받아들여 포상과 기록의 범위는 한층 넓어졌다. 그러나 전란 중인 탓에 근거 문서의 부족으로 일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전란으로 많은 수의 효자·충신·열녀가 양산된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광해군대로 넘어가게 된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1612년(광해군 4) 5월 21일부터 1616년(광해군 8) 5월 3일까지 편찬을 담당한 찬집청의 성립 및 편찬과정을 기록한 책인 의궤가 남아있으며, 이것은 여타의 행실도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따라서 의궤를 통하여 편찬 과정 전반을 재구성함으로써 광해군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다.
1612년(광해군 4) 4월 28일, 십 수 년 동안이나 미루어져 왔던 정문(旌門) 등의 포상 조치가 일괄적으로 처리된다. 그리고 곧바로 책의 간행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처음 편찬업무는 홍문관이 맡아 이미 정문(旌門)한 사람은 상편으로 하고 그 이외의 인물에 대해서는 정문할 만한 사람을 중편으로 그 이하는 하편으로 정리하였다. 1614년 정월 상중하 3편의 정리가 완료된 시점에서 편찬을 위한 별도기구의 설립요구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6월 초5일 이조에서 찬집청 관원 단자를 내고, 7월 초5일에 찬집청을 태평관(太平館)에 둔다는 등의 사목(事目)을 만들고 이조에서 차출한 인원에 대하여 광해군이 승인함으로써 찬집청이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상중하 3편으로 정리된 것만 해도 상편 775명, 중하편 348명으로 총 1,123명이 되어, 세종대 『삼강행실도』와 비교하여도 3배가 넘는 막대한 분량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 장에 2명을 수록하되 언해와 한문으로 된 행적기록만으로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쉽게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광해군의 지시로 인해 해를 넘긴 1615년 화원을 동원하여 그림을 그리는 일도 추가되었다.
드디어 총 4개월 여가 걸려 10월 초6일에 일을 마치고, 총 1,500여 장으로 정리하여 17권이 되었으며, 매 권에는 90여 장씩을 편하였다. 그러나 찬집청의 요구로 역대 행실도에서 우리 나라 인물들을 뽑아 수록한 1권을 추가로 만들어 총 18권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 때 이전 행실도에 수록된 국외인의 기사는 모두 삭제하고 우리나라 사람들로만 한정함으로써 '동국(東國)'이라는 특징을 유지하였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총 18권은 하삼도(下三道)와 평안, 황해도 등 5도에서 각각 경상도 4권, 전라도 6권, 공홍도 4권, 황연도 3권, 평안도 1권씩 맡아 인간(印刊)하도록 명하였다. 판각 과정과 인쇄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교서관에서 창준(唱準)을 차출하여 보내고, 특히 판각 부분의 감독을 위해 화원 이응복(李應福)을 딸려 보내도록 명하였다. 작업이 완료된 것은 1617년 3월 11일로 총 50건을 인출하여 공홍도에서 200책, 평안도에서 50책, 황연도에서 150책, 경상도에서 200책, 전라도에서 300책 등 총 900책이 진상되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경우 여타 행실도가 교화서 간행을 통해 윤리의 보급하려고 했던 것과 달리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기강을 확립하고 왕권을 회복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광해군이 선조대로부터 미루어왔던 정문조치를 신속히 처리하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간행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확립차원에서 백성들에 대한 위무 필요성과 자신의 왕권 안정이라는 목적 때문이었다. 실제로 수록된 1,587명 가운데<효자도> 253명·<충신도> 57명·<열녀도> 542명 총 852명이 임란이후 기록이며, 이중 선조대에 정문받은 경우는 14명, 충신의 경우에는 1명, 열녀의 경우에는 54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국신속상감행실』의 경우에도 선대 행실도를 계승하고 발전시켜가겠다는 의식이 담겨있다. 첫째, 책의 이름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신속(新續)'이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삼강', '속삼강'행실도를 잇는 새로운 행실도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하였다. 구성에서도 이전 행실도의 효자·충신·열녀의 구분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삼강행실도』와 『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우리나라 인물 72인을 별도의 한 권으로 구성하여 새롭게 편찬한 17권과 함께 묶어 간행하였다.
둘째, 책의 편찬체제 면에서 앞면에는 그림을 배치하고 그 내용은 뒷면에 수록하는 이른바 '전도후설'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특히 편찬과정에서 그림이 빠진 형태로 제작될 뻔하기도 하였지만, 광해군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선대의 행실도와 마찬가지로 그림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시기에 대한 적나라한 기록이었던 탓에 이전의 행실도와 비교하여 그 표현이 자극적이라고 할 만큼 그림표현의 리얼리티가 추구된 측면이 있다. 노출표현이 나타나며, 왜적에게 죽은 사람들의 경우 신체훼손상태가 그림에 그대로 표현될 만큼 표현이 과감하다.
5. 『오륜행실도』의 간행과 고민
『오륜행실도』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마지막 행실도로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일반 백성의 교화에 관심을 갖게 된 정조가 1797년(정조 21) 정월 심상규, 이병모 등에게 지시하여 7개월 정도의 편찬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책이다. 『삼강행실도』는 효자, 충신, 열녀의 3권 3책 구성이며, 『이륜행실도』는 형제·종족편, 붕우·사생편을 합쳐 2권 1책의 구성이던 것을 합쳐 『오륜행실도』라는 이름으로 5권 4책으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행실도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이 때 오륜행실도만 간행된 것이 아니라 『향례합편(鄕禮合編)』처럼 향례를 실천하기 위한 책도 함께 간행하였는데 『오륜행실도』는 『향례합편』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방민들이 유교의 기본 윤리를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스스로 『오륜행실도』로 간행할 것을 지시하면서 성리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소학』에 비견될 정도의 중요한 교화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정조가 행실도의 효용성과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 사건 속에서 즉위한 정조가 무엇보다도 국정을 이끌고 가는 기조로서 효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불교 경전이면서도 효를 강조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1796년에 간행하고, 이듬해에는 『소학(小學)』, 『향례합편(鄕禮合編)』, 『오륜행실도』를 차례로 간행하였다는 점에서 『오륜행실도』의 간행은 정치적인 의도도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이었다.
『오륜행실도』는 합본으로 간행한 것이지만 책의 체제와 내용면에서 기존의 행실도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다. 우선 기존의 행실도는 한글창제가 『삼강행실도』 간행 뒤의 일이었던 관계로 언해가 앞면 그림 위에 배치되게 되었고, 이후 행실도들도 이러한 방식을 대체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륜행실도』는 '삼강, 이륜행실도'를 합본한 책이었지만 언해를 한문 원문 뒤에 위치시켰다. 또한 정리자(整理字, 정조가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수원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다녀오는 과정을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인쇄하기 위해 만든 활자이기 때문에 정리자라고 불린다.)라는 금속활자를 이용해서 간행하였다는 점에서도 이전 행실도들과는 달랐다. 전체를 금속활자로 하지는 못하였고, 언해 부분과 그림 부분은 여전히 목활자 또는 목판으로 하고 있었지만 보다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과 정조 본인의 효성과 관련된 활자를 윤리교화와 관련된 책을 찍는데 사용했다는 점이 특별하다.
『오륜행실도』의 그림은 행실도 그림 가운데 가장 극적으로 바뀐 것 중 하나로 그린 화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구도와 인물 표현, 바위의 준법 등을 보아 김홍도(金弘道)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삼강행실도』가 안견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것만큼이나 당대의 최고의 화원이 참여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행실도가 『삼강행실도』로부터 장면을 복합방식으로 구성해 온 공통점을 갖고 있던 것과는 달리 『오륜행실도』는 『삼강행실도』나 『이륜행실도』의 복합 장면 중 한 장면만을 골라서 표현하고 있다.
그림과 언해가 분리되었다는 점과 그림이 수록 인물의 이야기 중 한 장면만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오륜행실도』가 대민교화라는 목적에만 충실하기 위한 책은 아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오륜행실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삼강행실도』의 수록인물 가운데 '곽거가 아들을 묻다(郭巨埋子)'라는 이야기와 '원각이 아버지를 깨우치다(元覺警父)'라는 이야기를 삭제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우선 그 내용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곽거는 가난하게 살면서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다. 세 살 먹은 아들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항상 음식을 남겨서 손자에게 주므로, 곽거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가난하여 먹을 것을 댈 수가 없는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함께 가서 아이를 묻어버립시다."라고 하니 아내가 따랐다. 땅을 석 자 파니 황금이 한 솥이나 나왔고 그 위에 글이 적혀 있기를 '하늘이 효자 곽거에게 주는 것이니 관가에서도 빼앗을 수 없고 다른 사람도 가져가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실록 기록에도 정조가 이 이야기를 빼라고 직접 지시한 부분이 보이는데 이렇게 한 이유로 주자(朱子)가 그 문인들에게 등유(鄧攸)의 이야기를 소학에 자세하게 기록하지 못하도록 한 것을 본받았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등유는 진(晉)나라 때 사람으로 난리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아들과 동생의 아들 유(綏)를 업고 달아나다가 두 아이 모두의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자기 아들 대신 동생 아들의 목숨을 지킨 사람이었다.
두 이야기 모두 자신의 어머니를 위하고 자신의 동생을 위하는 행동을 한 것에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을 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나, 모두 자기 자식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그 목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원각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원각(元覺)의 아버지 원오(元悟)는 성품과 행실이 착하지 못하였다. 원각의 할아버지가 나이들고 병드니 원오가 싫어하였다. 그래서 원각을 시켜 갈대 자리에 얹어 산 속에 버리게 하였다. 원각이 말리지 못하고 산 속에 갔다가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돌아오니, 원오가 말하기를 "흉한 도구를 무엇에 쓰려느냐?"하니, 대답하기를 "두었다가 아버님을 져다 버릴 때에 쓰겠습니다."하였다. 원오가 부끄럽게 여기고 드디어 할아버지를 도로 모셔 왔다.
원각의 고사는 소위 고려장 이야기와 내용이 똑같다. 이 이야기 속에서 원각은 자기 아버지를 깨우치기 위해, 나중에 늙으면 아버지를 내다버리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다. 이처럼 정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쁜 수단을 활용하는 이야기를 『오륜행실도』를 만들면서는 제외시키고 있으며, 한문 원문의 경우도 같은 목적에서 일부 수정된 사례도 있다.
이처럼 『오륜행실도』는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친 책으로 만들어졌지만, 정조시대의 정치적인 지형과 행실도에 대한 변화된 관점을 반영하여, 기존의 행실도들이 『삼강행실도』를 전범으로 삼고 똑같은 체제를 반복했던 것과는 달리 미묘하지만 큰 변화를 담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오륜행실도』에 그려진 150장의 그림은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이후 민화의 효자도에도 큰 영향을 준 바도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