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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아주 오랜 시간 바다 깊숙이 묻혀 있던 비밀과 마주한 순간!
인간은 수백, 수천 년 너머의 시간을 거슬러가며 역사의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가게 되는데요. 오래 전 바닷속 깊이 좌초된 배들과 역사 속에 등장하는 배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까요?

전통 배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우리 선조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배를 만들어 강과 바다를 다녔습니다. 비봉리 통나무배가 그 사실을 들려주고 있죠. 이 배는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배 중, 가장 오래된 배로 알려져 있습니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도 여러 척의 배가 등장하는데요. 십 수 명의 사람이 탑승해 고래를 잡는 배가 선사시대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후 실물 유물로 확인된 배 중에는 영흥도선이 있는데요. 통일신라시대 해양용 선박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수가 발견된 옛 선박은 고려시대 배인데요. 태안 마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마도 1, 2, 3호선이 대표적이죠.

“통나무 여러 개를 연결한 평저형(바닥이 평평한 형태)의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외판의 경우에는 아름드리 통나무를 휘어 있는 형태 그대로 한 단 한 단 올렸고요. 가룡이라는 구조와 차가룡이라는 구조를 통해서 횡강력(배의 변형을 막는 역할)을 보강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 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로형의 선수(船首) 구조가 확인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우리나라 전통 한선(韓船)의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순재 학예연구사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려시대 배는 내구성도 좋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배는 대선(大船)과 소선(小船) 합계 900척 건조를 완료하였으며 사용할 물품도 모두 원만하게 구비하였다.

- 『고려사』 「세가」 원종 15년(1274) 6월 16일

고려는 당시 원나라의 강요로 900척의 배를 건조했고, 원과 연합으로 일본 원정에 나섰습니다.

크고 작은 함선들이 파도 때문에 다 부서졌으나 유독 고려의 전선(戰船)은 배가 견고하여 온전했다.

- 왕운 『추간선생대전문집』

그런데 일본 원정에서 태풍을 만났고 이때 원나라의 배는 돌풍에 모두 부서졌지만 고려의 배는 대부분 무사했다고 합니다.

고려와 조선시대 배는 일반적으로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구조인데요. 이는 바닥이 V자에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 첨저선과 대비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 선조들은 평저선 배를 만들었을까요?

고려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조운 제도가 실시됐는데요. 이때 남해와 서해 항로를 주로 이용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남해안에서는 썰물로 갯벌이 드러났을 때 배가 넘어질 위험이 적은 평저선이 더 안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 속 전통 배의 활용은 어땠을까요?

2009년 발굴된 마도1호선이 들려주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 배는 1208년 전라도 포구에서 출항했죠. 전라도 지역의 곡물과 특산품을 가득 싣고 개경을 향해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태안 앞바다에서 순식간에 배가 좌초됐지 뭡니까? 그렇게 배는 바닷속 깊이 침몰하게 되었죠.”

마도 1호선은 조운선으로 추측되는데요. 이 이야기를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목간입니다. 화물표로 쓰인 목간에는 출항시기와 수신자 등이 적혀 있었죠.

고려 말 잠시 중단됐던 조운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는데요. 조선시대 선박으로 추정되는 마도 4호선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목간에 적힌 글자를 통해 전남 나주에서 한성 광흥창으로 가는 조운선으로 밝혀진 것이죠.

“태종은 무려 251척에 달하는 조운선을 건조해서 삼남지방에 배치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동법(세금을 특산물 대신 쌀로 내는 제도)이 실시됩니다. 이에 따라 물동량이 엄청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개인이 소유한 배들을 임대해서 조운을 하게 됩니다. 한강변에서 움직였던 경강사선(京江私船), 그리고 각 지방에서 개인들이 소유했던 지토선(地土船)을 조운으로 활용합니다.”

정진술 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기획실장

그런데 왜 배는 물류 운송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을까요?

원곡(세금용으로 운반하는 세곡) 800석에 잡비 포함 1,000석

- 『탁지지』 (1788년 편찬)

조운선 1척은 1,000석까지 운반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두 달 군량을 통계하면 4천 석인데 마부와 말먹이까지 합하면 그 수량이 갑절이 되어서 소용되는 복마는 적어도 5천여 필에 이를 것이다.

- 『비변사등록』 인조 16년(1638) 8월 13일

그에 비해 말 5천 마리는 8천 석을 운반할 수 있었다고 하며, 농군 600명이 200석을 운반한 적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농군 6백 명이 한 차례에 운반한 군량이 2백 석 뿐이다.

- 『비변사등록』 인조 16년(1638) 10월 27일

이처럼 배를 이용한 해상운송과 말과 사람을 활용한 육상운송은 효율성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이죠.

전통 배의 활용이 돋보이는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임진왜란 해전의 주력 군선이었던 판옥선이죠. 판옥선의 가장 큰 특징은 이중 구조의 갑판인데요. 때문에 노를 젓는 격군들은 판옥 안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었고, 병사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자리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었습니다.

대포를 발사할 때는 반드시 수(數) 리를 물러나므로 작은 배에는 대포를 탑재할 수 없다.

- 『승정원일기』 인조 15년(1637) 6월 7일

평저형 구조였던 판옥선은 복원성도 높아 사격의 충격에도 흔들림이 적었는데요. 이는 대형 화포를 발사하기에 유리했죠.
또 넓고 평평한 갑판은 더 많은 군사와 화포를 배치할 수 있었는데요. 이 모든 요인은 조선 수군의 원거리 공격에 힘을 실어 줬습니다.

“명종 10년(1555년)에 을묘왜변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바다에서 이를 막아야 할 우리의 맹선(조선 전기의 전투용 선박)과 소형 경쾌선들은 전혀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판옥선입니다. 조선 정부는 이 판옥선을 꾸준히 건조하여 임진왜란 이전까지 상당수의 판옥선을 맹선과 대체하였습니다. 실로 판옥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원동력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정진술 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기획실장

일찍부터 우리만의 기술로 배를 만들고 바닷길을 활용하고자 했던 선조들.
우리 해안의 지형과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선조들의 지혜가 옛 선박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우리 전통 배에는 서남해의 해양 환경에 적합한 평저선 구조가 주로 적용되었다.
2. 국가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운반한 배는 조운선이다.
3. 평저선 구조인 판옥선은 임진왜란 해전의 주력 군선이기도 했다.

해설

한국의 배

인간은 역사기록이 남지 않은 선사시대 때부터 배를 이용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는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통나무배들이다.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출토된 통나무배(丸木舟)는 약 8,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285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도 여러 척의 배가 등장한다. 돛대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배의 앞뒤가 높아 솟아 있고, 배 밑이 활처럼 휘어 있어 비봉리의 통나무배보다 발전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암각화에는 고래도 그려져 있어, 선사시대에 십 수 명이 탑승하여 바다에서 고래를 잡을 수 있는 배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와 가야에서는 배 모양 토기가 20여 점 이상 발견되어, 당시 배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이 같은 여러 양식의 배 모양 토기를 통해 이 시기에 단순한 통나무배뿐만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배들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삼국통일 이후 통일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발전된 조선․·항해기술까지 수용·융합시켜 발전시켰다. 통일신라시대의 장보고는 이 같은 조선·항해기술을 바탕으로 바다를 무대로 활약한 대표적 인물이다. 미국의 라이샤워 교수는 장보고가 이끌었던 청해진세력을 ‘해양상업제국 (Martime Commercial Empire)’이라고 부르고, 장보고를 ‘상인왕자 (Merchant Prince)’에 비유했다. 이 같은 장보고의 활약은 통일신라시대에 발달된 선박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실물 해양선박으로 추정되는 배로는 2012년 출토된 영흥도선이 있다. 이 배는 고려시대 선박과는 다른 저판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시대의 배는 서해안에서 발굴된 여러 척의 실물 배를 통해 그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다. 11~12세기의 배로 추정되는 십이동파도선과 완도선, 13~14세기 배로 추정되는 달리도선, 태안 앞바다 마도에서 2009~2011년까지 차례로 발굴된 마도 1·2·3호선 등이 대표적인 고려시대 배들이다. 고려시대 배들은 시대와 용도별로 약간씩 다른 점도 있지만, 대체로 바닥이 평평하고, 통나무를 여러 단으로 올려붙여 외판을 만든 후, 가룡과 차가룡으로 서로 연결해 배의 강도를 유지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같은 기본 구조는 고려시대뿐 아니라 조선시대까지 망라하는 우리나라 전통 한선(韓船)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선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강인한 내구성이다. 1274년과 1281년 여원연합군의 일본 공격 때 각각 900여 척의 고려 군함이 동원되었다. 이 때 원나라 배는 태풍을 만나 부셔졌지만, 고려 배는 손상이 적었다. 왕운(王惲)의 『추간선생대문집(秋澗先生大全文集)』에 따르면 “크고 작은 함선들이 파도 때문에 다 부서졌으나, 유독 고려의 전선(戰船)은 배가 견고하여 온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 배는 대체로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이 많았다. 이는 지역에 따라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과 바닥이 V자에 가까운 첨저선을 병행하여 사용했던 중국과는 다른 점이다. 평저선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한국 서해안에서 썰물 때 좌초할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세금용 곡물을 거두어 수도로 운송하는 조운 제도가 활성화되었다. 조운에는 남해와 서해 항로가 주로 이용되었는데, 특히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남해안의 자연 환경에 최적화된 배가 바로 평저선이었다.

배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물자와 사람을 수송하는 것이었다. 2009년 고려시대 조운선으로 추정되는 마도 1호선에서 도자기, 죽제품과 함께 목간이 발견되었다. 종이 대신에 나무에 글자를 적어 넣은 것을 목간이라고 하는데, 화물 운송 때 화물의 종류나 보내고 받는 사람을 표시하는 화물운송표로도 흔히 사용되었다. 발굴된 목간을 통해 마도 1호선이 1207~1208년경 장흥, 해남, 나주 등 전라도 지역의 벼, 조, 메밀, 콩, 메주와 고등어, 게, 젓갈 등 식료품과 고려청자, 대나무 공예품을 실어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운송하는 배였음이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일한 조선시대 선박인 마도 4호선도 조운선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은 고려 때의 조창을 9개로 재정비하여 조운제도를 다시 활성화시켰다. 조선 초기 태종은 무려 251척에 달하는 조운선을 건조해서 삼남지방에 배치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각 지방의 특산물 대신에 쌀을 나라에 바치게 하는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쌀의 물동량이 많아지게 되자 경강사선(京江私船) 등 개인이 소유하는 배들까지 쌀의 운반에 투입되었다. 조선후기에는 한강을 이용한 하운(河運)도 활성화되어 나루와 포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세금용 곡물의 수송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배가 맡게 된 가장 결정적 이유는 배의 탁월한 운송 능력 때문이었다. 1788년(정조 12년) 편찬된 『탁지지(度支志)』에 따르면, 조운선의 수송 기준량은 세곡 800석에 잡비를 포함하여 최대 1,000석에 달했다. 이것은 일종의 법적 기준이어서, 실제로는 1,000석 넘게 탑재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에 비해 『비변사등록』 인조 16년(1638) 8월 13일자의 기록에 따르면 말 5,000 마리는 8,000 석을 수송할 수 있었고, 같은 해 10월 27일자의 기록에 따르면 농군 600명이 운반한 군량은 200석 뿐이었다. 조운선 1척이 쌀 1,000석을 운반하는데 비해 말 1마리는 1.6석, 사람 1명은 1/3석을 운반하는데 그쳤다. 1,000석을 수송할 수 있는 조운선 1척을 대체하려면 사람 3,000명이 필요했다. 말로 수송할 경우에도 마부의 식량 외에 말의 먹이까지 필요하므로 실제 운반 가능한 화물을 더 줄어든다. 이에 비해 배의 수송능력은 사람, 말은 물론이고 수레보다도 월등하였다. 조선은 이 때문에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의 세곡을 주로 배를 이용하여 바다를 거쳐 서울로 수송하였다.

이밖에도 물고기를 잡는 어선, 외교를 위해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들이 탑승하는 통신사선 등 다양한 종류의 배가 역사 속에서 활용되었지만, 그중 돋보이는 활용 사례 중 하나는 나라를 지키는데 활용된 군선(軍船)이었다.

11세기 동여진 해적이 고려의 동해안을 노략질하자 고려는 성을 쌓고 전함을 배치하여 이를 막았다. 1019년 ‘도이’에 납치되었던 한 일본 여성은 자신을 구출해 준 고려 수군 병선(兵船)이 2층으로 되어 있고, 병선 선수에 적선과 부딪혀 부술 수 있는 철제 뿔이 달려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주력 군선인 판옥선은 주갑판 위에 상층갑판(상장)을 설치한 군함이었다. 주갑판에서는 안전하게는 노를 젓는 동안, 전투원들은 상층갑판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었다. 판옥선의 선체 크기는 20~30m에 달해,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주력 군선보다는 크기가 컸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1637) 6월 7일자는 “‘대포를 발사할 때는 반드시 수(數) 리를 물러나므로 작은 배에는 대포를 탑재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판옥선은 큰 선체 덕분에 사격의 충돌에도 흔들림이 적어 대형 화포를 운용하기에 유리했다. 또한 갑판이 넓고 평평하여 대포를 운용하고 전투원들이 싸우기에도 편리했다.

판옥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40여 년 전인 1557년에 처음 실록에 등장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연산군과 중종 대에는 대·중·소 맹선 중에서 크기가 큰 배가 전투에 유리한지, 아니면 작은 배가 유리한지를 놓고 여러 차례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임진왜란 때 주로 사용된 판옥선은 대맹선보다도 더 큰 배였다. 결국 16세기 중반 판옥선의 개발은 연산군~중종조에 걸쳐 오랜 세월 이어졌던 군함의 크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큰 군함이 유리하다’고 주장했던 대함주의자(大艦主義者)들이 최종적으로 승리했음을 보여준다. 판옥선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이었음을 고려하면, 임진왜란 해전 승리는 이미 전쟁 시작 40여 년 전부터 부분적으로 준비되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시대 군선으로 유명한 거북선은 지붕 혹은 덮개 역할을 하는 개판(蓋版)이 상층갑판의 윗부분 전체를 덮고 있는 특수한 구조를 가진 군함이다. 그 덕택에 상층갑판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적의 공격에 직접 노출되지 않고 배 안에서 안전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판옥선은 주갑판에 있는 인원들만 보호할 수 있고 상층갑판의 군인들은 열린 공간에서 전투하는데 비해, 거북선은 배에 타는 모든 사람을 실내에서 보호할 수 있는 것이 달랐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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