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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우리의 삶을 지키는 각종 안전안내문자도 매일 발생하는 사건사고도 스마트폰 하나로 간편하게 확인하는 사람들
그런데,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엔 어떻게 급한 소식을 주고받았을까요?
전파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던 전신, 우체국에서 출력한 전보, 하지만, 이조차도 없던 과거엔 어땠을까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선조들의 통신수단, 봉수를 소개합니다.

가장 빠른 통신수단 ‘봉수’

수원화성의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유달리 높게 솟은 독특한 건축물이 보이는데요. 대체 무엇이냐고요? 바로, 당대 최고의 기술이 집약된 봉수, 수원 화성 봉돈입니다.

봉수란 불과 연기로 국경지역의 소식을 전하던 제도입니다.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국방시설이자 통신수단이었습니다.

봉수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체계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습니다.

“왜적이 바다에 있으면 봉화를 2번, 국경에 접근하면 3번, 병선이 서로 싸우면 4번, 상륙하면 5번을 들게 하라.”

-『세종실록』 세종 1년(1419) 5월 26일

세종 1년에는 봉화의 숫자에 따라 신호를 정한 기록이 보입니다.

평화로운 평상시에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1개의 봉화를, 적이 나타나면 2개, 국경에 접근하면 3개, 국경을 침범하면 4개, 마지막으로 적군과 접전을 벌이면 5개의 봉화를 올려야 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주로 국경에서 아침 일찍 연기를 올리면 수도 한양에 가까워질수록 날이 저무는 바람에 초저녁 빛나는 불꽃이 되어 도착했죠.

어디서 출발하든 국경에서 한양까지 12시간 이내에 도착할 만큼 조선시대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봉수가 이동하는 길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 아셨나요?

먼저 함경도에서 강원도를 거쳐 내려오는 제1로, 부산에서 경상도를 거쳐 천림산을 통하는 제2로, 평안도 강계에서 황해도를 거쳐 오는 제3로, 평안도 의주에서 출발하는 제4로, 그리고 전라도 순천에서 출발해 개화산을 통하는 제5로가 바로 봉수가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봉화를 올리는 곳에 몸을 의탁할 장벽이 없으니 높게 연대를 쌓고 화포와 병기를 설치하라.”

-『세종실록』 세종 4년(1422) 8월 19일

세종대에 이르러 봉수는 서서히 한반도 특유의 형태를 갖춰 가는데요. 조선의 봉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서울 남산 정상에 위치한 경봉수.
조선시대에는 남산의 옛 이름인 목멱산 봉수라 불렸습니다. 이 목멱산 봉수는 수도에 위치한 중앙봉수인데요. 전국의 모든 봉수에서 전달된 각지의 소식을 모아 왕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푸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한 봉수도 있는데요. 이처럼 해안이나 국경의 최전방에 설치되어 적의 침입을 감시한 봉수를 연변봉수라 부릅니다.

조선의 봉수 중 가장 많은 형태는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던 내지봉수였습니다. 성남 천림산 봉수는 대표적인 내지봉수 중 하나인데요, 계단식 출입시설과 방호벽, 다섯 개의 연조 등 가장 일반적인 내지 봉수의 구조를 갖고 있죠.

“연조는 불을 때는 아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연조의 시설은 총 세 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요. 기단, 불을 때는 연조, 그리고 연기가 곧게 올라가도록 하는 연통 이렇게 세 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조수현 학예연구사 / 성남시

연조에는 연료를 넣는 거화구가 설치되어 있는데요. 불씨 역할을 한 볏단, 봉수군이 잘 볼 수 있도록 짙은 연기를 낸다고 전해지는 마른 쑥, 그리고 불씨를 유지하기 위한 말똥이나 소똥 등이 연료로 사용되었습니다.

봉수군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봉수의 특징 중 하나는 봉수군이 거주하던 주거시설을 따로 갖추고 있다는 건데요. 실제로 봉수대 인근에서 봉수군들이 생활하던 건물터가 발견됐습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당시 봉수군의 생활을 추측하게 하는데요. 봉수를 지키며 물을 마시기 위한 물병, 음식을 담는 항아리, 무기를 날카롭게 다듬기 위한 숫돌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봉수는 24시간 동안 지켜보면서 어떤 신호가 올지도 모른다는 상황 대기를 해야 합니다. 잠도 자고 다음 당번을 위해서 대기도 해야 하고 밥도 지어 먹고 식료 자원도 확보를 해야 하겠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 한 봉수에 참여를 하게 되는 거죠.”

김충배 부장 / 토지주택박물관(천림산 봉수 건물지 발굴조사 참여)

봉수대 인근의 작은 집에서 먹고 자며 봉수를 지켰던 봉수군들. 기록에 따르면 한 봉수에 근무하던 인원은 총 100명입니다. 어떻게 이 곳에서 100명이나 근무했냐고요?

실제로 근무한 봉수군은 25명으로 5명씩 한 조를 이루어 교대로 근무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75명은 실제 근무를 하지 않은 대신 식량 보급 등 경제적인 지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봉수군이 직접 작성한 문서가 후손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요. 부사가 내린 임명장, 근무를 철저히 하라는 전령문, 각종 무기 등 봉수대에 비치한 비품목록 등이 담겨있죠.

이처럼 체계적인 관리시스템이 있었지만 때때로 봉수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가 생겨났습니다.

“적이 국경에 이르렀을 때 끝내 봉화를 올려 경보를 알린 일이 없었으니, 변방에 근무하는 관리가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 『인조실록』인조 9년(1631) 7월 8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장 먼저 알려야 할 봉수가 소식을 전하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요.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에서 늘 연대위에 서서 봉수를 지키는 일은 매우 고되었고, 자식에게도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결국 근무를 태만히 하는 봉수군들이 생겨났던 거죠.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나라의 안전을 지켜왔지만, 자연조건이라는 한계를 넘기는 어려웠습니다.

“구름이 어둡게 끼거나 바람이 심하여 대응 봉수의 후망이 곤란할 시에는 신포, 뿔 나팔, 징 등의 시각과 청각에 의한 신호 수단을 이용하였으나 봉수 간 전달이 용이하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고종 때 근대적인 통신 수단의 등장으로 인하여 봉수제가 최종 폐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김주홍 전문위원 / 문화재청 사적분과

매일 봉수를 보며 안전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고 일상에 전념할 수 있었던 우리 선조들.

비록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늘 이 땅을 지켜온 봉수가 마치 수호신처럼 함께해온 것은 아닐까요.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봉수는 국경과 해안의 안전 여부를 중앙에 알리던 군사 통신 제도다.
2. 조선의 봉수는 경봉수, 연변봉수, 내지봉수 등 크게 세 가지로 구별된다.
3.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로 소식을 알렸다.

해설

1. 봉수란 무엇일까

봉수는 봉(烽:불)과 수(燧: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이다. 봉화는 원래 야봉(夜烽 : 밤에 횃불을 밝히는 것)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널리 주수(晝燧 : 낮에 연기를 피우는 것)까지 포함하여, 흔히 봉화라고 불렸다.

국경에서부터 수도까지 일정한 간격마다 불과 연기를 피우기 위한 시설을 만들고, 급한 상황이 일어나면 차례로 불을 지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안정적으로만 운영이 된다면, 사람이나 말보다 속도 면에서 훨씬 빨랐기에, 전기통신이 보급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물론 봉수라는 통신 방법을 개인이 이용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군사, 정치적 통신으로만 쓰이는 방식이었다.

연대의 설치 지역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로 구분되었다. 경봉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 목멱산(木覓山), 즉 현재의 남산에 위치하여 목멱산봉수 또는 남산봉수라고 불렀고, 연변봉수는 북방과 해안의 국경의 제1선에 설치하여 연대로 맡은 임무가 가장 무거웠다.

2. 조선시대의 봉수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봉수가 운영되었다. 봉수가 우리나라만의 특징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조선은 초기부터 봉수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북쪽 끝과 남쪽 끝의 지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특히 국경 지역에 설치된 봉수는 엄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변방의 봉수는 당연히 수도까지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세종대에 이르러 봉수제는 크게 정비되었다. 종래에 계승되어 온 봉수제를 바탕으로 규정을 정비하였으며 새로이 봉수대를 만들고 봉수노선을 확정하였다. 1419년(세종 1년) 5월, 병조의 건의에 의해 5단계로 나뉜 봉화 방식에 대한 규정과 처벌 규정이 새롭게 확립되었다. 적의 접근 및 접전 상황에 따라 올리는 불 또는 연기의 수를 달리하였고, 처벌 규정도 마련했다.

세종대에는 봉수제도의 폐단을 고치려는 대책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조선의 봉수제도는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의는 나아가 『경국대전』에 실린 봉수조항 규정의 원형이 되었다.

3. 전국에 봉수를 설치하다

조선 초기에는 야인을 방어하기 위해 산 정상에서 바라보며 경계를 하자는 의견과 봉수대를 설치하자는 의견이 충돌하였는데, 결국 봉수대 설치가 대세가 되었다. 따라서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지역에 봉수대가 설치되었다.

1437(세종 19년)에 이르러, 국경 지역에 초기봉수(初起烽燧)를 세우게 되었다. 말 그대로 처음 불을 올리는 봉수라는 뜻이다. 이후 봉수대 설치에 적합한 지역, 봉수대 사이의 거리에 대한 논의를 거쳐, 두만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의 연변에 봉수대가 모두 설치되었다.

일본에 근거지를 둔 해적인 왜구 집단은 고려시대 후기부터 우리나라 해안과 남부 지역을 수시로 침략하였다. 특히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재원인 세미(稅米)는 대개 바다를 통해 수도까지 운송되었는데, 왜구는 이를 방해하는 큰 위협요소였다. 건국 직후의 조선도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어책을 갖추어야만 했고 해안에 봉수를 설치했다. 제주에도 봉수가 설치되어 남해를 거쳐 제5로를 통해 한성까지 전달되었다.

경봉수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서울)에 있는 봉수이다. 현재 남산으로 불리는 목멱산에 있었기에 목멱산 봉수로도 불린다. 경봉수는 1423년(세종 5) 병조의 요청에 따라 목멱산의 5곳에 설치되었다. 이 5곳의 봉수는 각각 조선의 국경에서 오는 봉수를 받아 수도 한성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봉수망, 즉 여러 봉수들을 그물과 같이 구성하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조건을 고려해야만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0~20리를 기준으로 하되, 연변봉수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짧게는 3리, 길게는 10~15리 내로 촘촘히 배치하였다. 내지봉수는 짧을 경우 10리, 보통의 경우 30~50리, 길 경우 70리로 하였다. 전국 봉수대의 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으나 적게는 500개 이상 많게는 700개로 나타난다.

4. 봉수 일에 종사한 사람들의 삶

봉수대에는 그곳에서 생활을 하면서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평시에는 1개, 위급 시에는 그 이상의 봉수를 올리기 위해 봉수 시설을 관리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봉수대의 관리자급인 오장(伍長) 또는 오원(五員)과 봉수일을 담당하는 봉수군으로 구성되었다. 봉수군의 신분은 신량역천(身良役賤)이었다. 신분상으로는 양인(良人)이나, 담당하는 역은 천역(賤役)이라는 뜻이다. 봉수군이 담당한 일은 매우 고되었고 근무 환경도 열악했다. 나라에서는 그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주기 위해 노력했으나, 모든 봉수군이 담당 업무에 적합한 지원을 받았는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봉수대의 구조가 갖추어지면서 여기에 필요한 물품에 대한 규정도 마련되었다. 봉수가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불을 피우기 위한 시설(아궁이 혹은 굴뚝과 같은 시설)과 재료뿐만 아니라, 방어를 위한 벽, 무기와 봉수군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시설과 물품을 보관할 창고가 필요했다. 현재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유물·유적을 발굴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봉수제도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봉수대 시설관리는 물론, 봉수군의 근무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대체로 봉수를 올리지 않는 것, 중간에 전달하지 않는 것, 거짓으로 올리는 것, 봉수대 주변에서 불을 피우는 것, 검열에 불참하는 것, 허가 없이 인원을 교체하는 것 등이 처벌 대상이었다. 봉수를 올리지 않으면 참형에 처하거나, 멀리 변방의 군대로 보내는 벌을 내렸고, 중간에서 전달하지 않으면 장 80대를 맞고 이전의 역으로 돌아가게 하는 등, 처벌 규정을 마련했다.

5. 봉수 방법

봉수가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적의 침입을 신속하게 중앙까지 알리는 것이었다. 봉수의 신호체계는 기본적으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을 피워 불빛으로 전달하였다. 그러나 안개나 구름이 끼거나 비바람이 불 때는 불과 연기를 피우기 힘들뿐만 아니라 식별하기도 어려웠기에, 각종 나팔이나 화포 등 소리로 전달하거나(신포(信砲)), 직접 달려가서 보고하거나(치고(馳告)), 깃발로 신호하는 방식(현기(懸旗))이 사용되기도 했다. 봉수는 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일반적인 경우 북쪽과 남쪽을 막론하고 이른 아침에 봉수를 올려, 초저녁에 목멱산에 도달하게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봉수대에 한 개의 불빛(또는 연기)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오늘도 무사하구나”라며 안도하였을 것이다.

6. 허술해진 봉수제도과 실상

봉수는 긴급한 일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큰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외국의 침략에 의한 전쟁이며, 전쟁이 일어나면 봉수가 제일 먼저 역할을 해야 한다. 조선이 겪은 큰 전쟁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봉수는 주어진 역할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봉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은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사료에는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봉수제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조치들을 시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때까지 봉수제도가 줄곧 무너진 상태였고, 조선이 여러 차례의 전란을 겪었음에도 ‘반성’하지 않았다고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봉수제도가 해이해진 상황을 인지하고,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도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를 수정하고자 노력했으나, 연이은 전쟁 속에 제대로 복구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7. 전쟁 이후의 봉수제와 개혁 시도

큰 전쟁을 겪으며, 조선은 봉수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를 ‘봉수변통론(烽燧變通論)’이라고 한다. 정부에서는 무너진 봉수대를 다시 쌓고, 봉수를 더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선전관(宣傳官)을 봉수대에 파견하여 순시하기도 했다. 처벌 조항을 강화하는 한편, 물론 봉수군의 경제적 처지를 향상시키는 정책도 계속되었다.

봉수군의 도망과 구름이나 안개 등의 자연적인 장애로 인해 봉수를 확인할 수 없거나 봉수가 끊기는 등의 문제를 개혁하기 위한 개혁론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후기에 논의된 개혁론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각자거화론(各自擧火論), 봉수의 옮기거나 추가로 설치하는 방법, 마발(馬撥)의 배치, 화포설치론 등이었다. 이처럼 조선의 봉수는 완전히 새로운 정보 전달 방식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운영상의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운영되고 있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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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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