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개성 상인과 동래 상인2. 개성 상인의 활동과 정신개성 상인의 상업 활동

개성 상인의 두 가지 길

개성 상인의 상업 활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개성에 설치된 시전(市廛)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성을 떠나 전국의 각지를 돌면서 장사를 하는 행상(行商)이었다.

시전이란 일정한 공간에서 매일같이 상업 활동을 지속하는 상설 시장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가 아니면 시전의 형성이나 존립이 불가능했다. 조선시대 상설 시장은 서울의 시전이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시전은 누구나 아무데나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울의 시전 상인들은 정부에 일정한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대가로 특별히 허가를 받았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난전(亂廛), 즉 정부의 허가를 얻지 않은 상업 행위를 금지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받고 있었다. 이러한 독점적 지배권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은 막대한 상업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시전은 서울 외에도 평양, 전주, 개성에도 존재하였다. 개성의 시전은 고려 때의 시전을 계승한 것이다. 한양 천도 이후 개성의 시전 상인들은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한양으로 가서 서울의 시전 상인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전 왕조 지배층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단행한 이 정책으로 개성의 시전 영업은 한때 금지되었으나, 1409년(태종 9) 이후 다시 시전 개시를 허락하였다.115)

19세기 말까지도 개성에는 4전 16전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것은 큰 시 전 4개와 중소 시전 16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큰 시전 4개란 선전(縇廛, 立廛, 비단)·백목전(白木廛, 무명)·청포전(靑布廛, 중국산 면포)·어과전(魚果廛, 어물과 과일)을 말한다. 규모가 큰 4개 시전은 경제적 토대가 튼튼하고 특권도 막강하여 서울의 육의전(六矣廛)에 필적하였다. 이러한 시전들은 계(契)의 형태로 동업 조합을 형성하고 있었다. 독점적 특권 체계가 붕괴되어 껍데기만 남게 되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그들은 선전 20명, 백목전 17명, 청포전 37명 등으로 구성된 계를 묻고 영업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소 시전 16개는 문 밖에 백목전·의전(衣廛)·지전(紙廛)·유기전(鍮器廛)·장전(欌廛)·사기전(砂器廛) 등을 설치하여 영업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의 조사에서도 개성 지역에 큰 시전 4개 외에 중소 시전 16개가 존재한 것으로 밝혀졌다.116)

<개성 상인>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개성 상인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개성의 시전 상업은 개성에 잔류한 상인들이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개성 상인이 시전에서 취급하던 품목은 시전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 수공업 제품이다. 이미 16세기 무렵부터 개성에서는 유기 수공업이 발달하여 18∼19세기에는 구름다리 너머에 커다란 유기 수공업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개성은 초립(草笠)의 명산지로도 널리 알려졌다. 누르스름한 빛깔의 가는 풀로 엮어 만든 갓의 일종인 초립은 20세에 치르는 성년식인 관례(冠禮)를 한 청소년을 비롯하여, 하급 관원이나 노비까지도 쓰던 것으로서 수요가 매우 많았다. 1790년 당시 개성에는 초립 수 공업에 종사하는 여공들만 300∼400여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117) 이 밖에 개성은 종이나 천에 기름을 먹여 만드는 유삼(비우장), 초갑(쌈지) 등을 비롯하여 면포의 산지로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곳이었다.

이처럼 개성 상인은 서울과 함께 개성에 설치된 시전을 무대로 상업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성 상인의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국내 상업계를 전체적으로 연결하는 행상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행상이라도 개성 상인의 행상은 소자본으로 농촌 시장을 돌아다니는 일반 보부상(褓負商)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개성 상인은 대자본을 가지고 지방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대규모 행상을 전개하였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매년 연말이면 고향으로 돌아와 새해를 맞이한 다음 다시 목적지로 향하여 떠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상업의 결과를 결산하고 새해를 준비하려는 목적에서였다.118)

따라서 개성의 남성들은 겨울철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간에 개성을 떠나 있었고, 봄가을 두 차례 모든 농민에게 부과된 군사 훈련도 개성 남성에게는 가을철 한 차례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행상은 소나 말을 소유하고 여러 명이 행상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많을 때는 1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전국적인 범위에서 커다란 상인 동업 조합을 형성하고 있던 보부상들의 중심 세력으로 알려져 있다.119)

이런 조건은 그들의 주택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집 안 마당으로 들어가려면 오직 대문으로만 들어가야 하였다. 방문도 앞에만 문이 있고 뒤에는 벽체로 막혀 있었다. 모든 집이 벽체나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하여 대문 아래위에 문고리로 걸게 되어 있으며, 가운데에 있는 빗장을 꽂고 또 빗장의 유동을 억제하기 위하여 빗장걸개로 빗장을 고정시킨다. 이처럼 문단속을 철저하게 할 수 있도록 가옥 구조가 설계되어 있는 개성만의 독특한 특성도 바로 이런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도 개성의 남성들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승려들이 여염에 드나 들며 부녀자를 희롱하고 풍속을 어지럽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120)

<대한 천일 은행 장책>   
사개 치부법은 서양의 복식 부기와 근본 원리가 같으며, 이탈리아에서 13, 14세기에 발생하였다는 서양 복식 부기보다도 약 200년 앞서 있다. 이 부기법은 우리나라에서 1920년대까지 존속하였다. 대한 천일 은행(大韓天一銀行, 조흥은행의 전신)의 1899∼1906년 장부는 사개 치부법으로 작성한 장부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대한 천일 은행 장책>   
[필자] 정성일
115)박평식, 『조선 전기 상업사 연구』, 378쪽.
116)홍희유, 『조선 상업사』, 306쪽 ; 고동환, 「조선시대 개성과 개성 상인」, 213쪽 ; 善生永助, 「商人及商廛」, 『朝鮮人の商業』, 朝鮮總督府, 1925.
117)『비변사등록』 정조 14년 7월 26일조.
118)홍희유, 「송도 사개 문서(四介文書)에 반영된 송상(松商)들의 도고(都賈) 활동」, 51쪽.
119)『승정원일기』 939책, 영조 17년 12월 25일 ; 고동환, 「조선시대 개성과 개성 상인」, 211쪽, 214쪽 ; 홍희유, 『조선 상업사』, 307쪽.
120)『성종실록』 권290, 성종 25년 5월 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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