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래 상인이 개성 상인과 다른 점

동래 상인과 개성 상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유력한 지방 상인으로서 동래 상인과 개성 상인이 서로 연대한 흔적도 보인다. 개성 상인들이 몰래 일본에 물건을 내다 팔기 위하여 부산에 와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동래 상인이 의주 상인과 결탁하여 우피(牛皮), 즉 소가죽을 모두 매점(買占)해 버리자, 본래 소가죽 판매권을 가지고 있던 서울의 창전(昌廛) 상인들이 장삿길이 막힌다며 정부에 호소하는 일도 있었다.139) 이것을 보면 같은 시대 동래 상인이 개성 상인이나 의주 상인과 비슷한 상업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래 상인이 개성 상인이나 의주 상인과 다른 점도 적지 않았다. 우선 일본과의 무역에 독점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은 동래 상인이 아니면 가질 수 없었다. 물론 대일 무역 참가권을 획득한 동래 상인 중에는 동래 출신 상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조선 정부가 동래 상인의 수를 제한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그들 가운데 동래 사람보다는 서울이나 개성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 대일 무역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지역에 기반을 둔 동래 출신 상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40)
하여튼 동래 상인은 일본과의 무역에 독점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래 상인이라고 해서 일본과의 무역에만 종사했을 리는 없다. 마찬가지로 대일 무역 참가권을 얻어 왜관(倭館)에 드나드는 특권 상인들만 동래 상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동래 상인이라고 해서 동래 지역에서만 상업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즉, 우리가 동래 상인이라고 할 때는 표 ‘동래 상인의 범주’에서 보듯이, 왜관 출입 특권을 부여받은 상인을 비롯하여(C), 동래 지역을 주요 영업 공간으로 삼는 상인(A)과 함께, 전국의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는 상인(B)까지도 포함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는 동일인이 왜관은 말할 것도 없고 동래 지역과 전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여 상업 활동을 전개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 A와 B 그리고 C에 모두 해당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정부의 허가 없이 상업 활동에 종사한 상인(A′, B′, C′)도 넓은 의미의 동래 상인의 범주에 들어가게 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동래 상인이라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더라도 어디까지를 동래 상인으로 볼 것인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와의 관계 활동 범위 |
관허 특권 얻음 | 관허 특권 얻지 못함 |
동래 지역 | A | A′ |
전국 시장 | B | B′ |
왜관 무역 | C | C′ |
그런데 동래 상인 중에서도 C와 같은 동래 상인은 개성 상인이나 의주 상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일본과의 무역에 독점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게서 부여받은 동래 상인의 경우 엄밀하게 말하면 공상(公商)에 해당된다. 따라서 사상(私商)으로 분류되는 개성 상인이나 의주 상인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육의전을 비롯한 관허 특권 상인
에 대항하여 매점이라고 하는 독점적 영업 방식을 무기로 내세우면서 상업 자본을 축적해 가던 전형적인 사상 도고의 범주에 동래 상인을 포함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도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왜관 출입 동래 상인(C)을 제외한 나머지의 경우(A′, B′, C′)는 동래 상인을 사상의 범주에 포함시켜도 좋을 것이다.
개성 상인과 달리 조선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만 상업 활동이 가능했던 동래 상인의 한 부류가 존재하였다(C). 그런데 그 이유는 일본과의 무역 때문이었다. 즉, 일본과의 무역에 대한 조선 정부의 정책이 중국과의 무역의 경우와 근본적으로 다른 데서 비롯되었다. 중국과의 무역은 우리나라 사신이나 상인들이 중국으로 가서 상업 활동을 하였다. 이에 반해서 일본과의 무역은 일본 사신이나 상인들이 우리나라로 물건을 싣고 와서 교역을 하기 때문에 중국의 경우와 정반대 처지였다.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상인들이 물건을 싣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가서 무역을 한 예는 없다. 물론 조선의 역관들로 구성된 사행단이 대마도까지 왕복하는 문위행(問慰行)이나, 조선의 국왕이 일본의 에도(江戶) 바쿠후(幕府)에 파견하는 통신사(通信使) 일행 속에 상인들이 끼어드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일본에 가서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은 처음부터 금지되어 있었다. 일본에 가서 무역을 하다 적발되면 잠상(潛商) 행위로 간주되어 엄하게 처벌을 받았다.
일본과의 무역은 일본 상인들이 교역할 물품을 조선으로 가져와 조선에서 교환하였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일본인들이 묵을 공간과 거래할 장소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즈음처럼 호텔이나 무역 전시장 같은 시설이 없던 시절에 조선 정부가 일본에서 건너온 사신들을 위해서 마련해 준 곳이 바로 왜관이었다. 영어로는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 정도가 될 사신 일행의 임시 숙소인 객관(客館)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신 일행이 체재하는 동안 두 나라 사이에 무역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왜관이 객
관과 상관(商館)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관은 시대에 따라 장소와 규모를 달리하는 등 많은 변천이 있었다. 그런데 1678년 이후에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용두산 공원 일대에 해당하는 초량 왜관(草梁倭館)에서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1876년 개항 이후 이른바 개항장 무역이 전개될 때까지 왜관은 한반도에서 일본과 무역하던 유일한 공간이었다.
왜관을 짓고 그곳에서 교역한 것은 이전 시대에 비하여 무역이 크게 발
달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16∼17세기 이후 왜관에서 일본인들이 장기 거주하였다는 사실은 일본과의 무역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지속되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무역이 활발해지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왜관을 통해 드나드는 상인들이 국가 기밀을 누설할 염려가 있어서 보안 유지가 필요하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의 쓰라린 경험은 조선 정부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1678년 왜관을 두모포(豆毛浦)에서 초량으로 이전하면서 조선 정부는 일본과 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상인의 수를 20명으로 제한하였다. 일본인과 접촉을 제한하는 동시에 밀무역을 일삼는 잠상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정부가 왜관 출입 동래 상인에게 부여한 특권과 임무는 마치 시전 상인에게 준 난전 금지 권한과 같았다. 이런 점에서 공상의 성격을 띤 왜관 출입 동래 상인은 개성 상인이나 의주 상인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139) | 김동철, 「19세기 우피(牛皮) 무역과 동래 상인」, 『한국 문화 연구』 6, 부산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3, 415∼418쪽 ; 변광석, 「무역으로 큰돈 번 동래 상인」, 부산경남역사연구소, 『시민을 위한 부산의 역사』, 1999, 120∼121쪽. |
---|---|
140) | 하우봉, 「임진왜란 이후의 부산과 일본 관계」, 『항도 부산』 9, 1992, 120∼121쪽 ; 김동철, 「조선 후기 수우각(水牛角) 무역과 궁각계(弓角契) 공인(貢人)」, 『한국 문화 연구』 4, 부산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1, 66∼68쪽 ; 김동철, 「19세기 우피 무역과 동래 상인」, 27∼2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