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궁정 연회의 전통과 정재의 역사적 전개4. 정재의 역사적 전개 양상

조선시대 정재의 전개 양상

[필자] 사진실

조선 왕조는 예(禮)와 악(樂)을 치국(治國)의 도(道)로 삼아 정치를 행한다는 유교의 정치 이념 아래 악무(樂舞)를 중시하였다. 예는 도덕적 행위의 기준이며 절대 행위의 근거로서 명분을 밝혀 정치 사회에 질서를 가져오는 기준이 되며, 악은 사람의 감정과 관련되어 사람의 마음을 조화롭게 하여 화합과 결속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조선 초기의 정재는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함으로써 국가와 정치의 안정을 꾀하고자 한 문화적 통치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여악(女樂) 제도를 통해 고려시대 교방의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조선시대 여악은 1406년(태종 6)에 설치된 의녀(醫女)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각 지방의 관비 중에서 똑똑한 자를 선출하여 제생원(濟生院)에 소속시키고 글과 의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들 중 용모가 빼어난 자를 뽑아 가무를 학습시켜서 궁중의 각종 연회에 참여케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여악과 여기는 궁중에 예속되어 각종 궁중 행사와 의식에서 춤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의 교방과 맥락을 같이한다. 조선 초기 여악의 구성원은 대개 천민으로 구성되어 고려시대 교방의 구성원과 비슷했으나, 관비·관기·무당 이외에 ‘의녀’와 ‘침선비(針線婢)’가 참여하게 됨으로써 정재 구성원이 확장되었다.

여악 제도를 통해 교육받은 여령(女伶)들은 궁중 연회에 동원되어 정재무를 연출하였다. 조선시대의 궁중 연회는 규모와 의식 절차에 따라 진풍정(進豐呈)·진연(進宴)·진작(進爵)·진찬(進饌) 등으로 구분되었다. 각 연회를 준비하는 과정과 진행 절차는 당시에 기록된 의궤(儀軌) 자료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제 조선시대의 궁중 정재를 변화의 양상에 따라 제1기인 궁중 정재의 정착기(태조∼성종), 제2기인 궁중 정재의 변형기(연산군∼임진왜란 이전), 제3기인 궁중 정재의 재정비기(임진왜란 이후∼정조), 제4기인 궁중 정재의 부흥기(순조 이후)의 네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또한 조선 후기에 궁중 정재를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기녀인 선상기(選上妓)의 상경(上京)과 귀향(歸鄕)을 통해 궁중 정재가 지방 관아 등 민간 연희로 소통되는 양상과 반대로 민간 연희가 궁중 정재로 편입되는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필자] 사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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