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통 사회라고 유행이 없었을까
전통은 민족 문화에 있어서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문화적 바탕 또는 맥락이다. 전통하면 고루하고 버려야 할 유산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종종 있지만 무엇이든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 반복, 계승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전통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전통 속에는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 성원들을 알게 모르게 규제하며, 혈연이나 지연을 중시하고, 신분에 따른 위계적 인간 관계가 내재되어 있다.256)
조선시대에는 신분 제도에 따라 신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엄격한 구분이 있었으며, 출생과 함께 신분이 정해져 개인의 생활을 공적·사적으로 규제하였다.
이처럼 엄격한 신분 사회인 전통 사회에서 과연 ‘유행(패션)’이 존재하였을까?257) ‘유행’은 예로부터 사용한 말로 ‘유(流)’는 ‘흐른다, 유랑하다, 돈다’의 뜻을 갖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만 형태는 정해져 있지 않다. ‘행(行)’은 ‘진행한다, 행한다, 늘어서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유행이란 어떤 현상이나 사상이 사회에 널리 퍼지는 것을 의미한다.258)
유행에는 여러 종류와 영역이 있다. 의식주를 중심으로 하는 사물의 유행, 게임·스포츠·도박 등 행위의 유행, 인간의 정신적 과정과 그 산물에
관한 사상 및 사조(思潮)의 유행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일상생활과 관계가 깊은 복식은 타인과 동조하려는 욕구와 차별되려는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려는 미묘한 감정의 균형 위에 성립하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기도 하고, 동시에 공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유행에 대한 다양한 정의는 복식이 서로 다른 욕구와 동기에 의해 변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사회학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스펜서(Hebert Spencer, 1820∼1903)는 사회를 유기체로서 논하고 유행은 ‘위에서 아래로’, 소위 상층 계급의 새로운 행동 양식을 모방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하층 계급으로 도입된다는 하향 전파 이론(Trickle-down Theory)을 최초로 제창하였다. 모방은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며, 사람의 심리적 요인이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나는 상징물이다. 개인이나 집단이 특별히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상류 계급에 다가가기 위한 모방이 행해지면서 유행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적 유행론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8세기에 이미 서양에서의 유행론과는 정반대의, 더 진보된 형태인 유행의 ‘상향 전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복장에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창기(娼妓)들의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처첩에게 권하여 본받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익히게 한다.”259)라는 말처럼 조선 후기에 유행을 선도하였던 신분이 기생이고, 그것을 상류층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 사람이 사대부들이라고 한다면 유행의 전파 방향이 항상 위에서 아래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