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6장 동아시아의 명품, 우리 모피와 말5. 우리 문화 속의 말

신분 상징으로서의 말

말이 가지고 있던 현저한 특징은 마주(馬主)의 신분에 조응하는 신분적 장식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이 기르는 가축 가운데 유일한 사례이다. 말은 주인의 신분에 따라 예우를 받거나 천시되기도 하였으니, 이는 말에게도 일종의 신분제가 적용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사례로는 안승(安勝)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신라의 문무왕은 670년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던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막아보고자 하였다. 이때 문무왕은 책명문(冊命文) 및 각종 물화(物貨)와 함께 ‘갑옷 갖춘 말 한 필’을 보냈다.296) 문무왕이 보낸 말 한 필은 경제적 견지에서 평가되기보다는 안승에 대한 예우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만약 이때 문무왕이 말을 재산의 의미에서 보냈다면 한 필이 아니라 여러 필을 보냈을 것이다.

한편, 신라는 말과 관련하여 신분적 상징을 제도로 정해 놓고 운영하고 있었다. 신라는 골품제 사회였다. 골품제란 혈통의 존비에 따라 정치적인 진출의 한계, 혼인 등이 제한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6세기 초에 이미 법제화되었으며, 신라 멸망에 이를 때까지 약 400년 동안 거의 변함없이 신라 사회를 규제하는 중심 틀이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생활 전반에 걸쳐 고루 영향을 미쳤다. 골품에 따라 가옥의 규모, 의복의 색깔, 우마차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을 가하였다. 이 중 말 장식에 대해 살펴보면, 진골은 굴레와 멍에끈은 거친 비단을 쓰며 고리는 금, 은, 금동 등을 금하며 말방울도 금, 은, 금동을 금하였다. 그런데 6두품은 소굴레와 멍에끈은 베를 쓰며 고리는 놋쇠와 구리와 철을 쓴다. 5두품은 굴레는 없으며 멍에끈은 삼을 쓰며 고리는 나무와 철을 쓴다. 따라서 신분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남을 알 수가 있다.

<각종 마구의 명칭>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마구(말갖춤) 일습을 원상태로 만든 뒤 금령총 출토 기마 인물형 토기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말 탄 사람 그림의 마구를 참고하여 복원한 것이다.① 굴레(頭絡) ② 재갈멈치(鑣) ③ 고삐이음쇠(㘘繫) ④ 고삐(韁·㘘) ⑤ 가슴걸이(靷) ⑥ 안장(鞍裝) ⑦ 앞가리개(前輪) ⑧ 뒷가리개(後輪) ⑨ 언치(韉, 鞍褥) ⑩ 다래(障泥) ⑪ 발걸이(鐙子) ⑫ 말방울(馬鈴) ⑬ 밀치끈(鞦) ⑭ 말띠드리개(杏葉) ⑮ 말띠꾸미개(雲珠) ⑯ 깃대꽂이(寄生)

승마의 경우는 주인의 격에 맞추어 말안장부터 장식을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골은 안장 길마에 자단과 침향을 금하며, 안장 언치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을 금하며, 안장 방석은 모직과 수놓은 비단을 금하고, 말다래는 다만 기름에 절은 베를 쓰며, 재갈과 등자는 금과 금동을 쓰거나 도금을 하거나 구슬 다는 것을 금하고, 가슴걸이는 땋은 줄과 자색 줄을 금하였다.297)

<고대의 각종 마구>   
왼쪽부터 ①안장 뒷가리개, ②고리형 발걸이(輪鐙), ③재갈멈치, ④금동심엽형(金銅心葉形) 말띠드리개, ⑤말띠꾸미개, ⑥청동 말방울, ⑦은입사 주머니형 발걸이(銀入絲壺鐙)이다. 안장 뒷가리개는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의 것을 복원한 것이다. 표면 테두리 안에는 용무늬를 투각(透刻)하였고, 금동장(金銅裝)하였다. 고대에 지배층이 사용한 마구가 얼마나 화려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다.

한편, 여기서 수레는 5두품 이상이 타고 승마는 일반인까지 할 수 있었던 고대인의 관습을 볼 수 있다. 사료에는 수레에 대한 규정을 설명할 때 색복이나 다른 부분과는 달리 4두품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와 달리 승마의 경우는 일반 백성까지 그 규정을 언급하고 있다. 이 규정을 분석해 보면 신라는 수레를 탈 수 있는 계층이 정해져 있고, 그것은 5두품 이상에 한하여 허락되었던 권한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승마는 일반 백성도 다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자] 윤재운
296)『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년.
297)『삼국사기』 권33, 지2, 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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