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장시의 성립과 발전4. 약령시와 우시장

대구 약령시

<대구 약령시>   
약령시는 일 년 중 봄과 가을 두 차례 열리고, 열흘에서 한 달 정도 기간으로 개시되었다. 약령시는 전주, 공주, 청주, 원주 등에서도 열렸으나 대구의 약령시 규모가 가장 컸다.

조선시대 이래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오며 가장 크게 번성하였던 약령시는 대구 약령시였다. 대구가 약령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양하다. 우선 이곳은 경상좌·우도의 감영(監營) 소재지로 행정 도시로서 뿐만 아니라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물화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낙동강과 금호강의 수운을 이용해 운반된 각종 생산물을 해로를 통해 전라도 등지로 쉽게 운송하여 교역할 수 있는 이점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다 대동법의 실시로 한약재를 포함한 각종 관수품(官需品)이 장시를 통해 조달되는 조건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대구에 인접한 고을들은 대개 한약재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고령·성주·칠곡·선산·의성·군위·영천·경산·청도·합천을 비롯하여 비교적 거리가 떨어져 있는 안동·영양·봉화·예천·문경·상주·김천·경주 등도 한약재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이들 지역에서 생산된 각종 약재는 주로 대구 약령시를 통해 집산(集散)되었던 것이다.

대구 약령시가 개설되는 시기는 크게 봄에 열리는 춘령시(春令市)와 가을에 열리는 추령시(秋令市)로 나누어진다. 춘령시는 음력 2월 1일부터 말일까지 열렸고, 추령시는 음력 11월 1일부터 말일까지 열렸다. 약령시가 열리는 기간에는 각 지방에서 상인을 비롯하여 의료업 종사자들이 모이고 객주·여각·거간 등 중간 상인도 모여들었다. 이 기간에는 약재 거래 이외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기 때문에 숙박업·금융업·창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한몫을 거머쥐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약재의 진상은 2월·6월·7월·8월·10월·12월에 하였고, 2월과 10월은 인삼의 채취 상납 기일일 뿐만 아니라 다른 농산물의 출하 시기여서 이 시기를 개시 기간으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약령시가 열리는 장소는 원래 경상 감영 객사 앞 일대였다. 객사를 중심으로 봄에는 남쪽에 춘령시를 개설하여 남시(南市)라 하였고, 가을에는 북쪽에 추령시를 개설하여 북시(北市)라고 하였다. 1907년 이후 약령시는 지금의 약전 골목으로 불리는 남성로와 북성로 일대로 옮기게 되었다.

한편 규모나 개시 기간 등으로 볼 때 대구 약령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약령시가 개설되었다. 강원도의 감영이 있었던 원주의 약령시는 강원도 산간 지역 일대에서 생산되는 약재의 집산지 역할을 하며 개설되었다. 개설된 시기는 대구 약령시와 비슷한 시기에 창설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런데 원주 약령시는 교통의 불편과 이곳을 이용하는 상인·의 원 등의 발길이 점차 줄어들면서 상세(商勢)를 유지하지 못하고 1861년(철종 12)경에 폐지되었다.

원주 약령시는 춘시는 매년 음력 정월 25일부터 2월 5일까지 열렸고, 추시는 9월 25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렸다. 1905년 이 지역 유지들이 원주 지역 상업 활성화 방안의 하나로 약령시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상인들의 이용이 부진하여 이듬해에 폐지되고 말았다.

전라 감영 소재지로서 호남 지방의 행정 중심지였던 전주에도 약령시가 개설되었다. 전주 약령시의 개설 시기도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구나 원주 약령시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주 약령시는 춘시가 3월 15일부터 3월 25일까지였고, 추시는 10월 15일부터 10월 25일까지였다.

그런데 전주 약령시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공주에 약령시가 개설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1741년(영조 17)경 공주 지방 유지들이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약령시를 설치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에 전주 지역 주민들이 크게 반발하면서 수년간 소송이 진행되었다. 거리상 멀지 않은 곳에 약령시가 개설될 경우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곳이 바로 전주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그러므로 전주의 상인들이 크게 반발하는 것도 당연하였다. 서로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공주 측이 소송에서 이겨 공주에도 약령시가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공주에 약령시가 개설되면서 전주는 경쟁에서 점차 뒤처져 마침내 폐지되고 말았다. 전주 약령시의 폐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약재를 비롯한 각종 상품의 집산지로 공주가 전주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공주는 금강을 이용하여 내륙의 상품을 전국 각지로 운송하여 판매할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공주와 전주 약령시의 개시 기간이 같았던 것도 전주에는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결국 같은 기간에 같은 상품을 가지고 경쟁을 벌인 전주 약령시는 여러 가지 조건에서 공주에 밀렸던 것이다. 공주 약령시는 그 후 약 160년간 지속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약재의 관부 매상(官府買上)이 중단되면서 점차 부진하여 1905년경에 폐지되었다.

[필자] 김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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