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경제를 살린 상품 생산과 유통3. 도로와 수로를 이용한 상품 유통

무엇을 이용하여 어떤 물자를 운반하였을까

전국의 도로망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간선 도로가 있고, 간선 도로를 이용하여 마을과 마을이 연결되었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64)가 1862년(철종 12)에 혼자의 힘으로 완성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대로와 소로를 연결하는 작은 도로망이 무수하게 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국 주요 도로에서 간선 도로를 이용하여 지방 내륙까지 소로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방의 물산을 대로까지 운송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물자를 옮기는 데에 있어서 말이 수레보다 못 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즉 운송 수단으로 가장 뛰어난 것은 배를 이용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수레이며, 그 다음이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운반 수단은 인간의 육체노동이었다.

<경조오부(京兆五部)>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첩』 중 제1첩에 삽입된 서울 부근 지도이다.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뻗어나간 도로망이 잘 드러나 있다.

도로를 따라 물류를 이동할 때 적은 분량은 사람들이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상품을 유통하였다. 조선 말기에 등장한 보부상(褓負商)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보상(褓商)이란 머리에 상품을 이고 지역과 지역을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사람이고, 부상(負商)이란 등짐을 지고 지역을 이동하여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을 합쳐서 보부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머리에 이고 다니는 상인들은 대부분 여성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상품을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다니면서 팔았기 때문에 부피가 작은 물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에 부상들은 주로 남자들이 지게 등을 이용하여 등짐을 지고 물건을 팔았기 때문에 등짐장수라 불렀으며, 부피가 큰 광주리나 항아리 혹은 무거운 소금 등을 거래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거래 하는 물목(物目)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하지만 먼 거리를 왕래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보부상들이 조선 말기에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기 전까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기반을 두고 인근 고을을 다니면서 장사하는 ‘보따리장사꾼’이 대부분이었다.

<보부상>   
소유(小游) 권용정(權用正, 1801∼?)이 함지박과 그릇을 지게에 지고 가던 상인이 잠시 쉬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조선시대에 적은 분량의 물류 이동은 이와 같은 보부상이 담당하였다.

사람이 대량의 물건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운반하려면 물건을 싣고 움직일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도구로 우리 머릿속에 흔히 떠오르는 것이 마차이다. 오늘날에도 시골에 가면 소가 끄는 마차가 있고, 사람이 끄는 리어카나 발동기를 이용한 경운기 등이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다. 이와 유사한 도구는 조선시대에도 존재하였다.

수레는 조선시대에 물류를 이동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였다. 세조는 “한양 여러 관아에서 사용하는 잡다한 물건의 짐을 운반하는 일과 지방의 역로(驛路) 가운데 험난한 길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짐을 운반하는 손수레를 사용하라.”고88) 공조(工曹)에 명령하고 있다. 이 당시 짐을 운반하는 손수레를 편거(便車)라고 하였다. 이 손수레는 비교적 작은 수레로서 세 사람이 함께 앞에서 끄는 형태였다. 따라서 소나 말이 끄는 수레보다는 많은 양을 실을 수가 없었다. 또한 길이 좁고 울퉁불퉁하여 수레가 자주 부서졌다. 그래서 백성들은 물건을 등이나 머리에 이고 지고 가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여 물건을 짊어지고 빈 수레를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89)

그러다가 1683년(숙종 9)에 김석주(金錫胄)가 건의하여 10여 량의 거자(車子)를 만들어 국경 지대인 만주에서 처음 시험 운행을 하였다.90) 그리고 3년 후에 남구만(南九萬)이 “영변(寧邊)에서 거자를 만들어 복물(卜物)을 실 었더니 쇄마가(刷馬價)의 반을 절감하였다.”고 하면서 수레를 만들어 운행할 것을 건의하였다.91) 이 기록은 물건을 운송할 때 수레가 말보다 운송비가 절감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와 같은 주장은 영조 때 의주 부윤을 지낸 이현장(李顯章)의 상소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는 도로가 평탄한 의주로의 길목에 거자고(車子庫)를 만들어 평상시에는 방물(方物)을 실어 나르는데 사용하고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는 짐바리를 실어 나르게 하면 많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하면서 얼마 전에 폐지되었던 이 제도를 다시 실행하자고 하였다.92) 이것은 숙종 이후 거자의 운행이 지속적으로 활용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자는 한양과 의주를 연결하는 도로, 즉 비교적 넓고 평탄하게 정비된 도로에서만 이용되었을 뿐 다른 도로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크고 작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큰 수레가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도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과 수레를 끌 수 있는 소나 말이 풍족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소는 주로 밭갈이와 논농사를 짓는 데 요긴한 것이었고, 말은 군사용으로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소나 말을 함부로 죽일 수도 없었다.

한편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수레를 사용하여 물품을 유통시키는 것이 백성들의 생활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청나라를 다녀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쓴 박지원은 “이곳에서 천한 물건이 저곳에서는 귀할뿐더러 그 이름은 들어도 실제로 보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멀리 운반하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겨우 몇 천 리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백성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함은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고93) 하여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물자 유통에 수레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북학의(北學議)』를 지은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한양에서 수레 통행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성문 앞과 저잣거리의 작은 도랑은 복개하고, 세로로 걸쳐 놓은 나 무다리는 가로로 하여 수레가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94) 모두 수레의 장점을 살려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 때 대사헌을 지낸 홍양호(洪良浩)는 우리나라에서 수레를 많이 사용하는 곳으로 영남의 안동과 의성, 해서의 장연과 신천, 관북의 함흥 이남과 6진 제읍(六鎭諸邑)을 들고 있다. 나아가 수레를 이용함으로써 생기는 장점으로 “상인들의 물건을 수송하여 화폐를 유통시키고, 나라에 바치는 공물과 부세(賦稅)를 운송하여 비용을 절감하고, 말이 곤궁하지 않아 우역(郵驛)을 새롭게 할 수 있고, 기마(騎馬)가 넉넉하여 군사력의 증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95) 그러나 이와 같은 개혁안은 불편한 도로로 외적의 침입을 지연시키고 험준하고 높은 산봉우리에 성을 쌓아 적의 침입을 저지한다는 소극적인 국방 의식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큰 도로를 통해 많은 물자를 운반하는 것은 도로 여건상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방 마을 마을마다 거두어들인 쌀이나 면포 같은 직물류, 지방의 특산물 등을 한양으로 보내려면 소로 길을 따라 상품을 큰길까지 운송한 다음 다시 물길이 닿는 곳까지 옮겨 배를 이용하여 바닷길과 강물 줄기를 따라 한양으로 운송하는 것이 가장 용이한 수단이었다. 다만 상품을 배가 있는 곳까지 옮길 때 가장 많이 쓴 수단은 말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므로 온 나라의 장사치는 모두 말에다 화물을 싣는다. 그러나 목적한 곳의 길이 멀면 노자(路資)가 많이 허비되어 소득이 적다. 그러므로 배에다 물자를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것이 이익이 더 좋다.”고 하였다.96) 결국 말에 싣고 물가까지 상품을 운송한 뒤에 배를 이용해 먼 지역으로 상품을 유통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도로를 따라 운송되었던 물품은 다양하였다.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의식주(衣食住) 관련 모든 물품이 길을 따라 운반되었다고 해도 지 나친 말이 아니다. 다만 어느 것이 가장 주된 물품이었는가와 함께 실제적인 운송 여건이 어떠하였으며, 상인들이 상품으로 운송한 품목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이다.

<장터길>   
김홍도가 장시에서 장사를 마친 상인들이 말을 타고 줄지어 다음 장시로 이동하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이다. 대개 상인들은 상품을 소나 말에 싣고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상품을 이거나 지고 각 지역의 장시를 돌아다니며 장사하였다.

조선시대 길을 따라 운송하는 물품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국가에 바치는 세곡과 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각종 공물이었다. 나라의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내는 세금을 적절한 방법으로 한양으로 운송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화폐 경제가 발달하여 은행을 통해 모든 세금을 납부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면포나 미곡 등 현물(現物)이었기 때문에 운송 수단을 마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세곡이나 면포 같은 현물은 부피가 크고 양이 많아 수레를 이용하여 지방에서 한양까지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도로 여건이 좋지 않았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개인이 내는 세곡이나 공물을 가까운 해안가나 강가까지 가져다가 놓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여 모인 세곡이나 공물을 해안가나 강가에 쌓아 놓았다가 큰 배를 이용하여 바닷길과 강의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운송하였던 것이다.

또한 상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상품도 도로를 따라 많은 양의 현물을 운송하기에는 교통 여건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부득이 길을 따라 상품을 운반해야 할 경우에는 소나 말에 상품을 싣고,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상품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각 지역의 장시를 오가면서 장사를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결국 지방의 상품 유통은 장시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상인들이 소량의 상품을 소나 말에 의지하여 운송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필자] 이상배
88) 『세조실록』 권30, 세조 9년 1월 무오.
89) 『세조실록』 권32, 세조 10년 2월 계묘.
90) 『숙종실록』 권14, 숙종 9년 윤6월 계묘.
91) 『숙종실록』 권17, 숙종 12년 2월 무인.
92) 『영조실록』 권2, 영조 즉위년 11월 병진.
93) 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熱河日記)』 일신수필(馹汛隨筆) 거제(車制).
94) 박제가(朴齊家),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篇), 거(車).
95) 『정조실록』 권16, 정조 7년 7월 정미.
96) 이중환, 『택리지』 복거총론 생리(生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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